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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정, 푸른 방의 기원

푸른 방을 나온 그녀, 나의 이야기

by 할수 최정희

제4장 3 인문학이란 렌즈로 본 나

첫 정, 푸른 방의 기원

나는 아침이면 '첫정'이라는 태양이 떠오르는 따뜻한 세계에서 살았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고모는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슬픔이 컸다. 고모만이 아니라 할머니도 아버지도 각각 이들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자신을 지켜내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도 아버지도 고모의 그 슬픔을 헤아려 주고 보듬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이 없는 어린 고모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손을 내밀면 당장 그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손을 잡을 그 누군가가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고모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존재,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게 나였다. 고모는 처음부터 나를 곡비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슬픔을 잊게 해 주고 웃음을 되찾아 주는 '살아 있는 작은 인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울다가도 인형을 쥐여주면 울음을 그치듯 나도 그런 작은 위안의 대상이었을 거다. 한번 두 번 그렇게 위안을 얻다가 내게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까지는 괜찮다. 이후가 문제였지.

고모의 슬픔은 작은 '위안'만으로는 해결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형은 잠시 눈물을 마르게 해 줄 수는 있어도 쏟아지는 폭우를 막아 줄 능력이 없다. 폭우가 빠져나가는 물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내리면 논에 물이 가득 차고, 물이 넘치다가 논둑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논둑이 폭우를 감당하지 못했듯, 고모의 마음이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마음 둑이 무너진 것이다. 이 일은 고모의 의지가 아니라 자연이 이치로 벌어진 것이다. 빗물이 아래 논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자연이 이치이고 고모의 가슴 둑이 무너진 곳에서 슬픔이란 흙탕물이 '아래 논'인 나에게로 쏟아져 들어온 것도 자연의 이치이다. 고모가 마음먹고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위에 있던 논, 고모는 자신의 흙탕물을 '아래 논'으로 흘려보내고는 안도(카타르시스)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만족스럽게 활짝 웃었던" 고모의 감정은, 급히 화장실에 달려갔다가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의 속 시원함 감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막혔던 것을 흘려보내고 느끼는 시원함 말이다.

'아래 논'인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위에서 떠내려온 '고모의 슬픔, 흙탕물'에 잠겨버렸다. 그래서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둑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어떤 흙탕물도 내 영토를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더 높고 더 단단하게. 둑을 쌓고 '푸른 방의 빗장' 굳게 닫아걸었다.

앞장에서 말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발견한 마음속의 벽은 고모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서 흘러오는 흙탕물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생존의 둑'이었다. 이 둑이 너무 견고해서 문의 빗장이 둑에 달라붙어서 열고 나갈 수 없는 벽이 되었다. 이 문의 빗장을 여는 것이 내 평생의 숙제가 되었다.


첫정이란 가면과 맨얼굴

나는 아버지의 미소는 내 세상의 햇살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해 주었고 나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의 세상이 신뢰와 안정과 사랑이 섞인 따스하고도 밝은 햇살로 빛났다. 내가 바로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너의 만남을 경험한 것이다.


첫정에 빠졌다는 고모가 만든 세상도 처음엔 아버지가 만든 세상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고모가 먼저 나를 받아들였고 이후 나도 고모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내가 첫정이란 따스한 햇살에 빠져든 이후 고모와 나는 서로를 비추는 햇살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서로를 해지지 않는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고모가 연출한 꼭두각시 즉흥극으로 이 세계가 무너졌다. 고모가 즉흥극을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으로 연출했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모가 웃을 때 나도 웃고 고모가 울 때 나도 울게 하는 일이라면. 문제는 고모는 웃고 나는 우는 일이어서 다.

고모가 즉흥극을 할 때는 부버가 말하는 '너'인 나를 만나려고 내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고 오빠를 잃은 자신의 슬픔을 쏟아낼 안전한 그릇이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희 운다. 운다.”라는 고모의 외침은 나를 그런 그릇으로 만드는 주문이고 도자기가마 불이었다. 내 몸에 내려찍는 슬픔이란 도장, 낙인이었다. 고모와 내가 만든 세계를 깨는 도끼였다. 이 도끼질에 아버지와 내가 만든 세계까지도 무너졌다.

고모는 고모와 내가 만든 세계와 아버지와 나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화장실 용무가 급한 사람의 관심을 끌 것이 세상에 없듯 말이다. 고모는 화장실 용무를 끝낸 사람처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끈 사람처럼 카타르시라는 말에 올라타, 맨 얼굴을 드러내고 말았다. 고모가 던져버린 첫정은 유리잔처럼 깨져 폐기되었다.

다시는 다른 사람이 나를 가지고 놀지 못하게 나는 푸른 방 더 깊숙이 숨어들었다. 벽을 더 단단하게 두르고 빗장을 더욱 단단하게 걸어 잠갔다. 그 누구도 나를 넘보지 않게 하려고. 어느 날 빗장이 내게 항의를 했다. 빗장의 임무는 나를 지키는 일이지 가두는 일이 아니라며. 제발 제 임무만 수행하게 해달라고 내게 애원했다. 나는 이 애원에 못 이겨, 이 글을 쓰며 어떻게 자신을 지키면서도 가두지는 않을 수 있는지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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