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의 세상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맹수가 사는 사파리였다면, 나의 세상은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꼭두각시인형극 무대였다. 고모는 그 무대의 인형 조종사였고, 나는 그녀의 손끝에 매달린 인형이었다. 인형 조종사가 자신의 손놀림으로 꼭두각시들이 울거나 노래하게도 하였지만, 고모는 나를 “정희 운다, 운다.”는 한 가지 말로 울게만 조종하였다. 나는 인형극 꼭두각시에서 고모의 계획대로 고모의 슬픔을 대신 곡비가 되었다.
이렇듯 고모는 나를 슬픔의 사파리 속으로 내던졌다. 슬픔은 사자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이는 나만 아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도, 그것을 고모의 다정한 놀이쯤으로 여겼다. 누구도 고모에게 “그만하라” 말하지 않았고 나를 구해주는 이도 없었다.
고모가 내게 준 애정은 내가 비극의 배우가 된 대가였을까? 그 안에 얼마만큼의 진정한 사랑이 섞여 있었을까? 처음엔 고모의 말대로 부버가 말하는 나-너 관계였을 것이다. 이 첫정이란 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이 되었을 것이다.
침묵의 강요 vs 슬픔의 강요
제인의 주인, 리드 부인이 원한 것은 ‘침묵’이었다. 제인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면, 그것은 곧 ‘반항’으로 규정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불렀고, 그 대가로 붉은 방의 암흑 속에 갇혔다. 제인의 투쟁은, 목소리를 빼앗긴 세계에서 ‘그럼에도 노래하려는’ 싸움이었다.
나의 주인(고모)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특정한 '노래(눈물)'를 요구했다. 고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한국전쟁으로 오빠마저 잃은 사람이었다. 그 상실의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가슴에 안고 삭여야만 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 슬픔의 ‘대리 배우, 곡비(曲婢)’가 되어, 고모의 슬픔을 대신해서 진짜 울어야 그 놀이가 끝났다는 것이다. 제인이 '금지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싸웠다면, 나는 '강요된 노래'를 멈추기 위해 싸워야 했다.
고모의 꼭두각시놀음은 일종의 심리극(Psychodrama)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고모의 ‘미해결 된 상실’을 대신 살아냈다. 그렇게 고모의 슬픔은 나의 깊은 내면, 무의식 세계로 천천히 이식되었다.
맹렬한 저항 vs 내면의 붕괴
‘울지 않기로 한 결심’은 내 감정의 주도권을 지키려는 저항이었다. ‘나는 고모의 슬픔을 대신해 울어주는 곡비가 아니다’—이것은 영혼의 존엄성을 건 선언이었다. 그러나 고모가 “정희 운다!”라고 외치며 나를 몰아붙이는 순간, 싸움의 방향은 틀어졌다. 이때부터는 고모와 싸움이 아니었고 내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나 자신과의 투쟁이 되었다.
내가 터뜨린 울음은, 고모가 야속해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저항이 실패했다는 자괴감과 수치심 때문이었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외부의 공격이 내면의 자기 비난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제인의 상처가 외부의 폭력에 맞서다 생긴 흉터라면, 나의 상처는 내면으로 꺾여 들어간 자책의 칼끝이 만든 상처였다. 제인은 외부의 공격에 맞서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존재를 방어했다. 나는 '나는 의지가 약한 별 볼 일 없는 아이다'라며 나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끝나지 않은 노래
제인 에어는 그 억압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 하나로 붉은 방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끝내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고모가 시집가 집을 떠난 지 육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그 슬픈 노래는 여전히 내 안에서 울린다. 이 노래는 과연 나의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고모의 곡비가 부르는 애가(哀歌)인가. 아니면 이 둘 다인가.
나는 이 울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글을 쓰다가 문득 깨닫는다. 수십 년 내 속에서 나를 울린 이 노래가 나의 것이 아니면 그 누구의 것이겠는가. 곡비의 애가이든, 나의 애가이든, 혹은 둘 다 혼합된 것이든. 이제는 분명히 나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의 경계 긋기를 그만두고, 이 울음소리를 어루만진다, 아프지만, 이 아픔 속에서도 나로 살 수 있는 법을 찾아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