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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May 13. 2022

미움이 사랑으로 다가올 때

살면서 어떤 사람은 괜스레 쳐다 보기만 해도 밉상이고,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싫고,  남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잘난 체해서 어울리기 싫다. 또 너무 아는척해도 질투다. 그러나 딱히 무어라고 꼬집을 수 없으면 “준 것 없이 밉다”라고 했던가? 우리는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심통이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게

-  열등감 때문일까?

-  자존심 때문일까?

-  아니면  경쟁심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런 편견 없이 모두 다 어울리며 산다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어떤 이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며 곧잘 지내다가  싫으면 언제 우리가 알고 지냈냐는 듯이 여지없이 갈라 치기를 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도 싫다는 내색을 않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할 뿐 겉으로는 평상심을 잃지 않아 그 속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크렘린” 또는 “응큼한 사람”이라고 불러준다.


나는 대체로 흑백논리로 사람들을 갈라 치기 해버린 편이다. 만나서 웃고 즐기고 우의를 다지면서 잘 지내다가도 자존심을 살짝 건드린다 든가, 선을 넘으면 아주 냉정하리만큼 내리쳐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더러 “성격이 까칠하다”라고 한다. 그렇다고 내 속마음을 감추면서 까지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다던가 애교를 부리는 것은 못 할 일이다.


친구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친구가 취기가 있었는지 나에게 삿대질하며 목청이 올라갔다. 오랜 시간 함께 지냈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는 분명코 얼굴 근육이 경직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또 한 친구를 갈라 치기 한 순간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친구가 전화를 해서

“어제저녁에 미안했어, 내가 친구들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어, 당신이 처음이야 “  

내가 비록 실수는 했지만 당신에게 특별한 예우를 갖춘 거라는 의미다. 글쌔 그 정도의 특별한 관계라면 취중 실수가 가능할까? 곁에서 이를 지켜본 아내가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너그럽게 받아 주시구려, 그것도 취중에 있었던 일인데요”


흔히들 취중 실수라는 이유로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실수도 선택적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생활 20년 동안 꼭지가 돌만큼  진창 나게 술을 마시면서 수많은 주사(술주정)를 봐왔다.

+  노래를 부르는 사람,  

+  우는 사람,  

+  술이 깰 때까지 얘기를 하는 사람,  

+  욕을 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도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결코 직장상사나 예를 갖춰야 하는 웃어른들에게 시비 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게 주사 상대가 선택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친구는 이후에도 나에게 두세 번 전화를 했지만 내 목소리가 예전처럼 정겹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선 요즘에는 연락이 뜸하다. 이에 아내가 다시 나서서

“ 여보, 사람 사는 세상 완벽한 사람이 얼마나 있으리오?  장기판에서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게 없겠소.  

*  제임스는 약속을 안 지켜서 싫고,

*  루가는 자기 부인을 너무 고생시킨다고 미워하고,

*  피터는 음흉하다고 만나기를 꺼려하니

그러지 말고 둥글게 사세요."


그렇게 일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그 누구보다 맨 먼저 꽃과 음식을 사들고 문병을 왔다.


순간 나는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여보게 미안해.

자기가 뭐가 미안해?”

그는 미안하다는 내 속마음을 알기나 할까?


그이는 비록 실수는 했으나 실망한 내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며 기다렸고 예전처럼 식사도, 여행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성큼 손을 내밀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내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 걸음에 찾아왔으니 어찌 내가 그이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움이 사랑으로 다가온 순간이다.


그동안 나도 그이를 다시 받아 주려고 나름 노력도 해봤다. 주말이면 성당을 찾아 한 주간을 뒤돌아 보며 미워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 달라고 기도도 해봤지만 머리로는 용서가 돼도 가슴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늘 따로따로였다.


오늘 문병차 찾아온 친구가 마침내 내 마음을 머리가 인도하는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 줬다. 다행이다. 나와 함께하고 싶은 친구를 잃지 않고 간직하게  됐으니 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처럼 마음과 머리가 함께하여 사람들을 갈라 치기 하지 않고 원만하게 함께 어울려 살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는 내일이 오지 않고 오늘이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내일이면 원래의 까칠한 성격으로 돌아가 다시금 사람들을 갈라 치기를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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