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귀하다. 위에 살 때는 또 내리는군. 아래로 조금 내려왔다고 또 여기만 안 내리는군. 1월이 지나가고 2월이 다가왔는데 아침에 거실 큰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눈이군. 첫눈인가. 눈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조바심이 났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어디로 가지?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
앞을 닦아주는 와이퍼가 움직인다. 눈인데. 비가 아닌데. 그냥 둬도 되는데. 눈 덩어리가 되어 눈 속에서 잎맥처럼, 뻗친 눈맥 사이로 앞을 보며 나아가면 되는데. 어떤 시인은 손에 닿으면 사라지는 눈이라, 언어로 눈을 잡은 것이 시라고 했고, 어떤 시인은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이 시처럼 보여 시인처럼 시를 적었다고 했다. 내 기억 속의 말이라 어떤 시인인지, 정녕 그 시인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눈이 내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내 마음만 동하고 하루를 무너뜨리며 어디로 가는 것은, 나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분명 어제 읽은 책의 표지가 눈 같아서이다. 돌 같아서이다. 작은 돌을 호주머니에 넣고 손으로 굴리는 책 때문이다. 무채색 표지 속의 동그라미가 돌인지 눈인지 실뭉치인지 사과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시인은 돌을 좋아하고 간직하고 선물하고. 모든 시인이 그렇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시인은 그렇다. ‘인간은 중력이 있어 고정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그럼, 인간은 눈처럼 지워지는 존재라서 돌에 대한 갈망이 있나요? ‘그러면서 또 벗어나길 바라기도 해요.’ 그래서 시인은 눈을 사랑하나요? ‘지워져 있어도 지워진 곳에서 지워진 것들을 만나는’ 눈 같은 존재들을요.
‘스몰 버드’ 의 큰 창밖으로 카페에 갇힐 것처럼 내리던 눈이 한순간 투명한 빛이 나고 기와지붕에서 우두둑 떨어져 비가 되더니 언제 눈이 내렸니, 해가 내린다. 해의 손길이 닿지 못한 응달의 돌 틈에만 하얀 눈이 아직 솜털처럼 자라나 있고 서서히 움직이는 해가 갈대의 그림자를 뚫을 때까지 눈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기 전 새벽 4시에 눈이 떠져 다 읽지 못한 책을 마저 읽고 달리기를 했었다. 책에서 읽은 ‘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너도 썩고 있는 거야?’ 물었고, 달리는 귀엔 정용준 작가가 말하는 『이 사소한 것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 펄롱’이 수도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거리를 걸었던가, 그때의 장면이, 그때 내가 느낀 부끄러움과 경외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작은 점이 점점 커져 나를 삼키려 하고 그럴 때마다 문장을 찾아 문장에 기대었다. 관념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추상을 구상으로 바꿀 때까지’ ‘생각에 몸 만들어주는 일’을 하다 보면 ‘생물의 감각을 가진 언어’를 건져 올릴 수 있을까, 그때 난 하나의 돌이 되어 손안에 온기를 간직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진한 글씨는 이원 시인의 말
저는 늘 언어가 삶을 건져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생각에, 언어에 잠식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또 이럴 때 우리는 언어에 그대로 잠식당해야 하는지, 혹은 언어를 이기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언어가 삶을 건져올린다고 믿는 쪽이에요. 그러다보면 언어의 비중이 높아지니 언어가 가라앉아요. 많이 기대면, 기댄 것이 아주 단단하지 않으면 기울겠잖아요. 그래서 언어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언어의 힘을 키우도록 애써야 해요. 힘있는 언어로 만들어야 해요. 이때 제일 먼저 없애야 하는 것은 언어에 깃든 관념. 포커스는 현실에 들어가도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그런 생물의 감각을 가진 언어겠냐는 지치지 않는 반문.
『물끄러미』(이원), 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