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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새, 5]

by 검은개

보리수 열매 같은 게

희끗희끗 보이다가

모기 중에서도 독하다는 산모기라

새빨간 물감 한 방울 한지에 번지듯 뜨거워진다


한 군데라 느낀 곳이 둘 셋 늘어갈 때

이상하게 모기가 안 문다는

당신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청량하던지

바람 부는 산길을 함께 걸었다


솔은 왜 솔인지

청설모는 왜 설인지


어둑해지는 잎사귀 밟으며

숨는 땅거미를 따라갔다

내려오는 행인들은 곧 어두워지니 돌아가라 한다

산의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오니


비 오는 날 창문 열고 제습기를 틀고 싶은 날이 있었다

관람 방향 반대로 전시물을 보고 나온 날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질 거란 안전안내문자는

기척 없이 울리고


모기 물린 데를 보고는

장난스럽게 침 발라줄까 묻는 입꼬리에

*진눈깨비가 성글게 쌓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흰』 한강,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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