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작년 여름 제주도에 갔을 때 시집을 챙기지 못했다. 가족과 책방에 들러 각자 여행하는 동안 읽을 책을 한 권 고르기로 했다. 책방 이름은 ‘소리소문’. 도심과 동떨어져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숲속에 덩그러니 있었다. 유명한 책방인 듯 사람들이 북적였고 이곳저곳 사진 찍고 한쪽 벽엔 추천 도서가 크게 쓰여 있었는데, 그중 시집이 눈에 띄었다. 이병률의 ‘이토록 사랑한 적’. 시집을 찾아 펼쳐보았다. 시인의 말이 무척이나 좋아 첫 시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미술관의 이 방과 저 방을 지키며 살아가던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 안내문이 적혀 있었지만, 행여 사람들이 그림을 만질까 봐 방을 지켰다. 이 방과 저 방의 거리는 서로가 점으로 보이는 거리일까. 저 방 그림이 궁금해 그림을 지키며 훔쳐보기도 하다가 점이 커져 사람의 윤곽으로, 눈동자가 보이는 거리로. 슬퍼요. 당신이 지키는 그림이. 당신의 그림도 그런가요.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내민 손, 잡은 손, 이 방과 저 방을 잊은 꼭 잡은 두 손. 각자의 방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니는 두 사람. 간절히 또 간절히 자유롭게 그림을 잊은 듯. 순백의 종이에 두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며 어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춤추듯 살랑거리며 나란히 공간을 넘나드는 두 사람이 아름다워 그림이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따라다니는 걸까. 이 방과 저 방이 아닌 어떤 그림 안에서 두 사람이 온전히 사랑하도록?
‘어떤’을 찾아보니, ‘대상을 뚜렷이 밝히지 아니하고 이를 때 쓰는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생각할수록 어떤 그림인지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 그림. 멈추지 않고 강하게 생각해야 어렴풋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 어떤 그림이면 좋겠어?
- 순백의 그림. 온통 하얀 눈이 내려 종이보다 하얀 그림. 왼쪽 가장자리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 있으면 좋겠어.
- 난 바다가 떠올랐어. 망망대해. 한없이 커서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 그림이. 그림이 마음 같아.
둘은 그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움직임이 없지만 둘의 사랑은 역동적이라 그림이 될 수 없는. 언젠가 둘 사이에 잔잔한 물결이 흐르면 그때 그림 안으로 들어갈까, 그럼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또 다른 어떤 사람과 거리가 좁혀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어떤 그림으로 미술관의 벽면을 가득 채우는 상상.
그림이 내밀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전시한 미술관을 간직한 사람들. 그 사랑을 지키며 어떤 사람과 거리가 좁혀지고 사랑을 하며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그림이 되어 사랑을 지키게 하는 사람들.
시인이 말했다. ‘눈냄새를 맡았는데 맡는 중이었음에도 눈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고. ‘시는 그런 것’이라고.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어떤 그림을 보면서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워, 우리는 어떤 그림 안으로 들어가 사무치게 그리운 사랑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