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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숙 Aug 31. 2024

내가 떠나갈 때

어떤 죽음이든 정답은 없다

       

누구나 죽는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예기치 못한 삶의 엔딩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나의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듯이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긴 시간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하늘을 날아가는 동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세상을 향한 꿈으로 한껏 부풀었던 어린 시절,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란한 한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아름다운 시절, 돌이켜 보니 행복했던 순간뿐이다.

그의 죽음을 위해 가족들은 동행한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와 아직 해 줄 것이 더 많이 남은 자녀들, 삶의 오르막 내리막을 울고 웃으며 함께 있어 준 형제와 친구들이다. 일행은 비행기에서 내려 관광 명소를 둘러본다. 다 함께 식사하며 아쉬움 가득한 시간을 보낸다. 며칠을 지인들과 보낸 후 그는 어디론가 향한다. 그곳의 책임자인 듯한 사람과 오랜 시간 상담한다. 그의 확고한 결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다.

침대에 눕는다. 잠시 생각에 젖어 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그는 결심한다. 스위치를 밀어 올린다. 천천히 약물이 떨어진다. 그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니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 아름답고 감사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시간을 거슬러 가다 어린 시절의 그를 만나며 눈을 감는다.

조력 사망에 대한 방송을 보았다. 조력 사망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 환자가 스스로 약물을 투여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에는 허용되지 않은 조력 사망을 하려면 현재 유일하게 외국인의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는 스위스로 가야 한다.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허용하는 단체는 네 곳이란다.

조력 사망 단체 대표는 환자가 침대에 누우면 몇 가지 질문을 한다. 당신은 여기 왜 오신 건가요. 밸브가 열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나요. 당신이 죽기를 바란다면 지금 밸브를 열어도 됩니다. 환자는 밸브를 밀어 올리고 30초가 지나면 잠이 든다. 2분 후에 사망에 도달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선택지 없는 신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대개 죽음이라는 명확한 진실을 모른 체하며 살고 있다. 의사가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죽음에 대해 인식한다. 그리고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생각한다. 환자들 대부분 정신이 온전할 때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조력 사망을 위해 스위스로 향하는 이유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이다. 고통이 극에 달하고 그 상태의 지속이거나 회생의 기미 없이 계속 나빠져 연명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결심한다. 생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감사와 당부를 전하며 헤어짐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녀의 남은 날도 며칠 남지 않아 보였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이삼일 안에 세상을 떠날 거란 예측을 하였다. 의사는 환자 가족들과 면담을 통해 소견을 전하고 병실을 나갔다. 가족은 DNR 동의를 한 상태였다. 가족들은 회의 끝에 이후 약물과 음식을 거부하고 연명을 위한 모든 것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다시 통보했다.

그녀는 L-tube를 한 상태였다. 흔히 콧줄이라 부른다. 다른 환자들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을 때 그들은 콧줄을 제거해 달라고 했다. 음식을 거부했으니 콧줄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병동의 수간호사도 퇴근하였고 같이 근무하는 동료에게 전달했으나 의사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에게 희망을 걸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그녀가 온전한 모습으로 가족과 함께 지내다 떠나기를 바랐다.

또 한 번 부탁했다. 간곡한 눈빛이었다. “의사의 지시가 있어야 뺄 수 있습니다. 더는 어떤 처치도 않겠다 하니 지금 빼 드리면 좋겠지만 내일 아침 의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생각하겠지만 의료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니 저희 마음대로 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간호사의 말을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마지막 희망이었을 거다. 그날 콧줄을 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나는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권한도 없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응급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음식을 거부했으니 쓸모없는 콧줄이다. 자꾸만 마음이 쓰여 그녀에게로 향하는 걸음을 어쩔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고 마지막 인사 몇 마디라도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100세에 가까운 그녀는 콧줄을 하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도 성질이 칼칼했다. 꾀가 많아 순간적으로 콧줄을 빼내어 근무하는 이들을 힘들게 했다. 그녀가 콧줄을 한 이유는 음식을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의식이 또렷할 때는 가려우니 긁어 달라 이불을 덮어 달라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간혹 죽여 달라는 부탁도 했다. 가족들에게 듣기로는 그녀는 조선의 왕비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피딩도 안 할 텐데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안 빼 준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또 항변한다. 그날따라 그녀의 콧줄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빨대만 한 줄이 엄지손가락 굵기처럼 느껴졌다.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자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거다. 몇 차례 그녀 곁으로 가서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하고 임종을 맞았던 모습이 스쳤다. 임종 전 마지막 3일을 가족들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보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몇 마디라도 듣고 싶어 몇 번이나 손으로 호흡기를 떼는 착각을 했었다. 한동안 산소호흡기에 동의한 큰오빠에게 원망의 마음을 가졌었다.

말없이 그녀 곁으로 가서 콧줄을 뺐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뺄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심했다. 그녀가 콧줄을 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들은 몇 번의 감사를 전하고 그녀와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저는 해고될 각오하고 제거하는 겁니다. 어머니와 마지막 시간 잘 보내세요.”

나는 데스크로 가서 보호자들이 간곡히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제거했다고 보고했다.

“저도 그런 사정을 몰라서 안 빼 준 게 아닙니다. 그건 의사의 영역입니다.” 의사의 지시 없이 행동했다며 화를 냈다. 이내 의사와 연락이 닿았다. 콧줄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 처신이 옳았다는 건 아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내 선택은 비슷했을 거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가족들에게 각인될 그녀의 모습이 좀 더 편안하고 평소의 엄마 모습이기를 바랬다. 이틀간 쉬고 출근했을 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잠깐씩 깨어나 자녀들과 얘기도 나누다가 다음 날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떠나가셨다.

나에게도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은 분명히 올 것이다. 고통 속에서 연명하는 분들이 돌아가시면 고통이 없는 곳으로 편히 가셨다며 슬픔을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 있고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니 어떤 죽음이든 정답은 없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존엄사는 나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말한다. 몸이 힘들어 고통에 휩싸인 채 살아간다면 그건 고통의 연장이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며 항변한다. 그래서 스위스로 가서 존엄사를 선택한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갈 수 없는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스위스에 가는 것은 자살을 돕는 살인 방조죄가 된다고 하니 선택했다고 해도 실현에 옮기기는 어렵다.

집에서 한 달에 지불하는 간병비가 수백만 원에 이르고 병원비와 간병비까지 더하면 모아 둔 재산이 밑바닥을 드러내는 건 시간문제다. 가족이 간병을 한다더라도 그건 한 사람의 인생을 담보로 한 연명이니 그마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한 이들은 보고 싶은 이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이별의 시간으로 걸어간다. 나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의견이 팽팽하다.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면 떠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그들의 말에 나는 귀 기울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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