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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 아줌마 6

제목은 티나이야기, 작가는 정은이언니

by 이정

정은이언니가 준구아줌마를 따라 우리집에 들어왔던 날이 떠오른다.

"너가 정은이구나!" 하며 반겨주는 엄마 뒤에 숨어 나는

혹시나 정은이언니가

신데렐레 신디게임 사건이나, 아가씨 사건들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고 눈치가 보였다.

언니를 그리 바라던 맘이 간절했던만큼

내 지난 잘못으로 절호의 기회가 망그러질까 걱정이 되었고,

엄마가 없으면 나를 방에 데리고 가서

너 우리엄마에게 왜 그랬었냐고 혼을 낼까봐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언니는

준구아줌마처럼 조용하고 찬찬했다.

나를 좀 챙겨주라는 준구아줌마 말을 성실히 따르면서도

덥썩 다가오지도, 아주 멀어지지도 않는 정도로

내가 맘을 놓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정은이언니와 함께 명자언니를 마주쳤던 날,

삐죽대는 명자언니가 민망해서

서둘러 명자언니에 대해 설명하는 내게

정은이언니는 "나랑 나이가 비슷한가보네." 라고 했다.

믿을수가 없었다. 훨씬 큰 어른처럼 느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가 만난 모든 언니들중에 가장 의젓하고 차분했다.

노는 것보다 준구아줌마의 일을 돕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고

목소리도 커지는 법 없이 어른들 눈 밖에 날 행동은 전혀 없었다.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던 정은이언니의 어른스러움.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언니의 그 의젓함이 슬프게 기억된다.

누가 그 해맑아야 할 소녀를 애어른으로 만들었을까.

누가 그 나이의 어린 소녀를 아침마다 엄마와 함께 남의 집으로 출근을 하도록 몰아세웠을까.


나는 늘 그렇듯 정은이언니에게도 수시로 질문을 쏟아내었는데

준구아줌마 딸답게 대답은 간결했고, 그닥 자세한 정보를 주지는 않았다.

"언니는 정은이언니인데, 왜 아줌마는 준구아줌마야?" 라고 물으면

"우리 오빠야."

"오빠는 집에 있어?"

"몰라 나도. 어디 있는지" 식의 대화였다.

언니의 차분함은 더 이상 질문을 끌고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 있어서

나는 조각난 이야기들로 만족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언니와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티나 이야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렵, 전설의 고향에 열광하는 아이었다.

혼자 잠들 밤이 무섭고, 반절은 이불을 뒤집어 쓰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도

일주일 한 번, 전설의 고향을 보는 시간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두근대는 날들이었다.

준구아줌마를 도와 빨래를 개키고 있는 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정은이언니는

티나이야기를 해주었다. 언니가 본 영화라고 했다.

언니의 티나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나왔다.

티나이야기는 전설의 고향만큼이나 무섭고 흥미진진해서 나는 틈만나면

"언니 언니, 어제도 티나이야기 봤어?" 하고 물었고, 언니는 때마다

"응 봤지. 해줄까?" 하며 바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 언니는 집에만 가면 티나이야기만 보나보다 싶었으나

지금의 나는, 그리 즉흥적으로 맛깔난 이야기를 지어냈던 언니가 대단했구나 싶다.

내 기억이 맞다면, 어쩌다 한 번씩 오던 정은이언니는

시간이 갈수록 방학만 되면 하루걸러 하루씩 준구아줌마를 따라왔다.

그러니, 티나이야기도 끝도없이 이어졌는데

몇번째 이야기인지 세다가 숫자가 점점 커져서 결국 포기했었던 걸 보면

정은이언니는 방학만 되면 수시로 우리집에 왔다고 느꼈던 기억은 사실이었나보다.


엄마는 정은이언니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에는 반찬 좀 많이 먹으라고 성화였다.

왜 자꾸 맨밥만 먹냐며 밥술 위에 반찬을 얹어주곤 했는데

준구아줌마는 "어유 그냥 냅두세요." 말렸고, 정은이언니는 다음 밥술은 또 맨밥만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무언가 마뜩찮은 눈치였다.

정은이언니에게 미소를 보이기도 하고, 의젓하다고 칭찬을 하면서도

정은이언니가 가고나면 꼭 엄마에게

"언제까지 저리 따라다니게 할거라니?" 라며 물었다.

"그러게요. 오죽하면 데리고 오겠어요. 부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이인데."

"그놈의 놈팽이는 여전히 그런다니?"

"그런가봐요. 아줌마도 딱하고 애도 딱하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애를 남의집 일에 데리고 다닐거야. 쯧!"

나는 까탈스런 할머니가 역시나 정은이언니를 못마땅해 하는구나 원망스런 맘이 일었으나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쯧'은 정은이언니나 준구아줌마에게 향했던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있다는 '그놈의 놈팽이'에게 날리는 말이었음을.


티나이야기를 해주면서도 빨래를 개고,

준구아줌마를 도와 먼지도 닦고,

식탁에 앉으면 말 한 마디 없이 맨밥을 먹던 정은이 언니.

그런 딸을 챙기기는 커녕, "놔두세요 놔두세요." 하며 반찬 올려주는 엄마를 말려야 했던 준구아줌마는

자연스레 내가 눈치챈 바로는

집안의 놈팽이에게 수시로 맞는 여자였다.


전원일기나 수사반장을 보면, 아내를 두들겨 패는 남자들이 종종 등장했는데

나는 그저 공주이야기처럼 지어낸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내 추측이 틀렸으리라 여기고 지냈다.

그러나, 언젠가 창호 아줌마가

몰래 쌍꺼풀 수술을 하고 왔다고

창호 아저씨가 창호 아줌마를 두들겨 팼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정말 그런 일이 있는거구나. 싶어졌다.

도대체 준구아줌마는 뭘 잘못해서 그 집 아저씨에게 허구헌날 맞고 오는걸까 싶었다.


아줌마가 허리가 아프다고 끙끙대며 정은이언니와 함께 왔던 날,

나는 조심스레 언니에게 왜 준구아줌마는 자꾸 다치는지 물어보았는데

"나도 몰라." 라고 서둘러 대답을 끊어내는 모양을 보며

내 추측이 정말 맞을지도 몰라, 생각했다.

눈치를 채고나니, 듬성듬성 파악되던 어른들의 대화가 끼워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왜 할머니가 남의 집 아저씨를 향해 '그놈의 놈팽이' 라고 못마땅하게 부르는지,

왜 엄마와 은밀하게 대화를 하고나면 준구아줌마의 눈두덩이가 뻑하면 벌개지는지,

왜 나는 수시로 준구아줌마에게 호랑이고약을 가져다줘야 했고,

왜 정은이언니는 학교를 가지 않는 방학이면 아줌마를 따라 우리집으로 와 있곤 하는지,

어린 마음에도 앞뒤가 꿰어지고도 남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들은건지, 아니면 눈치로 알아차린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어른이 된 후에 나는 엄마에게 준구아줌마를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 준구아줌마 기억나? 그 아줌마 그 집 아저씨한테 맞고 살았었지?"

엄마는 그랬었지, 하며 또 금란여고 이야기로 시작하여

정신나간 놈팽이를 욕했고, 뒤웅박팔자가 되어버린 준구아줌마를 딱해했다.

"정은이언니는 왜 그리 우리집에 왔었어?"

"나도 모르지. 그런데 그 성격에 나한테 그리 부탁하는걸 보니

백수건달 즈이 아빠랑 여자애를 둘만 놓고 나오지 못하는거구나 싶었지."

"준구오빠는 집 나간거였어?"

"그 놈팽이가 아줌마도 두들겨패고, 걔도 두들겨패고, 그래서 나갔다더라.

내가 그래서 그 얘기 듣고는 준구아줌마라고 안 불렀잖아. 그냥 아줌마라고 불렀지.

두들겨맞고 집나갔다는 자식 이름을 어떻게 자꾸 입에 올리겠어."

"그랬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 안해줬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뻑하면 준구아줌마, 준구아줌마, 그랬었어."

"그랬니? 아이고 난 몰랐네. 너도 아줌마한테는 그냥

아줌마라고만 부르는줄 알았지."


준구아줌마와 정은이언니는

어느날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

갑작스런 준구아줌마의 전화에 엄마는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고,

나는 아가씨 사건이 떠올라, 혹시 나 때문인건가 눈치를 살피며 겁을 먹었다.

두 모녀가 우리집에서 사라지고 나는

저번처럼 엄마가 설득해서 다시 올지도 몰라, 하며 기다렸지만

메주아줌마가 오기 시작하며 이내

아 정말 이별이구나, 이제 내 인생엔 준구아줌마가 없구나, 깨닫게 되었다.

가족 같았던 그녀들이 내 인생에서 없어질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혼란스러웠고, 메주아줌마에게도 정을 붙이는 것이 처음엔 머뭇대게 되었다.


"엄마, 그 때 준구아줌마가 왜 갑자기 그만뒀어?"

"모르지. 모르는데 그만두기 좀 전에 또 그 집 남자가 패서 심하게 아파했었거든.

그게 뭐 문제가 생겼나 걱정이 되긴 했는데

물어봐도 그냥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안 알려주니

나도 왜 갑자기 못 오게 됐는지 알 길이 없지.

그 이가 안 벌면 살 수가 없는 집이었는데 그러는거 보니

뭔 일이 나긴 났구나 싶기만 했었어."


심하게 맞았다던 그 날이

하루종일 준구아줌마가 허리를 못 펴고 끙끙대었던 그 날이었을까.

허리가 불편한 아줌마를 위해

정은이언니가 유독 잰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집안일을 거들었던 그 날이었을 수도,

혹은 내가 눈치채지 못한, 또다른 아줌마의 고통스런 날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 나는 정은이언니가 작가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

"왜?"

"이야기를 진짜 재미나게 잘 지어냈거든. 작가하면 정말 잘 할텐데."

"그랬니? 걔가 영리했어. 어른스럽기도 하고.

공부도 제법 했던 것 같은데 상고 간대서 나도 좀 아깝다 싶었지."


내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을 때면,

작가를 꿈꾸었던 시절에,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이 브런치를 알게 되고,

이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하며.

나는 정은이언니를 자주 떠올렸다.

영리하고 어른스러웠던 정은이언니.

전설의 고향보다도 무서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겪어도

언제나 용감하게 이겨내는 티나를 꿈꾸며 산 것일까.

툭 치면 화르르 풀어내듯 끝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줄 알았던

그 정은이언니는 무얼 하고 있을까.


준구아줌마가 별 탈 없이,

더 나은 날들을 위해 우리에게 이별을 고했던 것이었기를 바란다.

아침마다 엄마 뒤를 따라 남의집으로 출근해야 했던 사춘기 소녀 또한

멋지게 그 시기를 이겨내고

담담히 상처들을 풀어낼 여유를 지금쯤은 가지고 살길 바란다.


날벼락 같던 이별 앞에

겁나기도, 그립기도, 원망스럽기도 했던 나의 준구아줌마는

내게 축복이었다.

때로는 미웠고, 서운했던 순간들도 있었으나 누가 뭐래도 준구아줌마는

집이 전부였던 천둥벌거숭이 시절을 지나, 유치원으로 학교로 세상을 넓혀가느라

혼란스러웠던 나에게 가장 너그러운 어른이었다.

동생을 맞이하고 홀로 서러웠던 마음들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떼를 부려댈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게다가 언니가 간절했던 내게 정은이언니를 선물해준 존재였다.


새벽이면 여기저기 아픈 몸을 추스리며

남들은 한참 속썩일 나이라는 사춘기 딸을 깨워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남의집으로 데리고 와야 했던 준구아줌마가

지금은 아주 나른한 늦잠을 자도 되는 날들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몸에는 멍자욱이 없고, 마음도 다치지 않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는 남의집 엄마를 만류하는 일 없이

이거 먹어, 저거 먹어, 직접 수북히 올려주며 딸에게 혹은 손주들에게

마음껏 밥상머리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인생과 꼭 닮게

남의집 빨래를 개키거나, 방마다 걸레질을 하는 어린 딸을 보는 일 없이,

자신과 아주 다른 삶을 사는 딸을 보며

"쟤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다." 식의 푸념도 해보는 그런 인생이면 정말 좋겠다.

'그놈의 놈팽이' 가 없는 곳에서

준구오빠도 만나고, 정은이언니 효도도 배불리 받는

어쩌면 남들에겐 아주 평범한 날들이

준구아줌마에게도 허락되어졌기를.


그 시절, 나만 예뻐해달라며 떼를 부리고, 거침없이 속내를 뱉어버리던

아주 날 것이었던 아이는 이제 커서

간절히 기도해본다.

준구아줌마도, 정은이언니도

나에게 베풀었던 모든 복을 빼놓지 말고 받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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