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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 아줌마 1

품위는 차림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by 이정

갑작스런 준구아줌마와의 이별은

돌이켜보면 내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엄마아빠보다도 내 하루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이가

이유도 모르는 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은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제법 커서

이제는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아직 어린 동생도

은퇴하고 집에 계신 할머니에게 맡기면 되었기에

아줌마의 부재는 더 이상 예전같이 비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안일은 일절 도와주지 않으면서도

집이 어지럽거나, 식탁이 부실하면 여지없이 '쯧' 소리를 내는 할머니 때문에라도

엄마는 아줌마를 구하기 위해 허둥지둥 바빴다.


나 또한 그랬다.

뻑하면 엄마를 울리는 할머니가 조금씩 미워지는 때라

하루종일 할머니를 보호자로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아줌마가 없는 이유로

약속도 못 나가고, 교회활동도 빠져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쯧 소리를 곁들이며, 습관처럼 혼잣말을 했다.

"얘는 왜 이걸 여기에 던져뒀다니. 쯧."

"점심은 언제 차리려고 아직도 안 온다니. 쯧."

하며 하루종일 쯧쯧대고 돌아다니셨고,

나는 그 소리가 아주 듣기 싫어서 열심히 엄마를 대변해주느라 바빴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하는 어린 손녀를 보며 할머니는

"쟨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야? 쯧." 하며 상대도 해주지 않았었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분해서

준구아줌마가 언젠가 올까봐 마냥 기다리고 싶은 맘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구라도 새로 와서 얼른 할머니로부터 벗어나고팠다.


드디어 새로운 아줌마가 오던 날,

나는 여지없이 전날 밤 엄마아빠에게 불려가

새로운 아줌마가 오시면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말라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으나,

나는 이미 준구아줌마를 통해 '아줌마를 대하는 방법'을 어느정도 익혀 놓았으므로

그닥 새로울 것은 없었다.

나는 이제 아줌마란

가족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준구아줌마에게 했던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반성하고 후회하던 참이었으므로

(아마도 그 때까지도 나는, 어쩌면 나 때문에 준구아줌마가 그만둔 것이 아닐까 겁을 먹었던 듯 하다.)

부모님이 시키지 않아도 조심할 참이었다.


새로 온 아줌마는 너무나 낯설었다.

안그래도 준구아줌마의 자리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데

새 아줌마는 생김새부터 분위기까지

준구아줌마와 영 딴 판이었다. 아니, 내가 본 다른 집 아줌마들과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다소 볼품 없었던 준구아줌마에 비해 이 아줌마는

늘씬하고 예쁘장하며, 무엇보다 당당했다.

엄마도 아줌마를 준구아줌마와는 좀 다르게 대했다.

준구아줌마와 있을 때에 엄마는 늘

한참 나이 많은 준구아줌마임에도 보살펴줘야 하는 사람쯤으로 대했었는데

이 아줌마와는 친구같은 분위기었다.

같이 하하, 웃기도 하고

농담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시간이 좀 흐르니, 엄마가 되려 이 아줌마에게 속엣 얘기를 털어놓으며

(대부분은 할머니에 대한 고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위로 받기도 하고, 심지어 준구아줌마처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사실, 이쁘장하고 왠지 모르게 멋졌던 이 아줌마가

처음 집에 들어올 때부터 맘에 들었다.

엄마 소개를 받자마자 "이정이 안녕?" 하는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준구아줌마와 비교 아닌 비교를 하며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내게도

"이정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구나?" 라던가

"와서 이것 좀 잡아줄래?" 라며

자연스레 나와의 관계를 이끌어 주었고,

아직 어린 동생을 대하는 태도도

"옳지 옳지, 잘하는구나.", "딱하지, 아줌마가 해줄게." 하며 밝고 에너지가 넘쳐서

늘 우울하고 힘들어보였던 준구아줌마와는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었다.

게다가 이 아줌마는 한 번도 내게

"언니가 되어 가지고는." 이라던가 "동생인데 양보해야지."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동생이 내 색칠공부책을 죄다 뜯어놓거나, 인형 모가지를 잡아뽑아 놓으면,

"에그, 동생이 나쁘네. 이정이가 화날만 하다!" 하며

되려 내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새 아줌마는 내게 백점 만점에 백점이었다. 최고였다.


그 중에서도 정말 신기했던 것은

누구든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새 아줌마가 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엔 사람을 잘 들였더라." 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칭찬이 박했던 할머니가 아줌마도 좋다 하고, 엄마도 칭찬하니

나는 저녁을 먹다가 입이 떡 벌어졌었다.

우리는 새로운 아줌마를 만나

준구아줌마에게 미안하도록 빨리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더 나아지고 있었다.


아줌마를 새로 만나면 나는 왜 그리 이름을 물어봤는지.

아마도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생기면 "너 이름이 뭐야?" 라고 다가가는 것에 익숙해서였나보다.

이름을 묻는다는 건 내게

친해지고 싶다는 표현이었으므로

나는 이번에도 새 아줌마에 대한 탐색전을 마치고, 제법 맘에 들었을 무렵부터

아줌마 이름은 뭐냐고 거듭 물어봤었는데

"아줌마는 이름이 없어." 라며 아줌마는 말도 안되는 대답을 반복했다.

나는 왠지, 친해지고 싶다는 내 표현을 거절당한 듯 하여

잠깐 새초롬해졌다가도

아줌마의 다정한 말투와 미소를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다음에 다시 물어봐야지- 하고 다짐을 하며 물러서곤 했다.

그러나 언제나 아줌마는 "나는 이름이 없어." 라고만 대답할 뿐

이름이 뭐라고 당췌 알려주지를 않았다.


아줌마가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어디 살아?" 라는 질문에는

"밤이 되면 하늘나라에 갔다가 아침이 되면 이정이네 집에 오지." 라고 한다거나

"아줌마네 집에도 애들이 있어?" 하고 물어보면

"내가 사는 하늘나라에는 백명도 넘게 애들이 있어." 라고 하는 등

도대체가 허무맹랑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만 늘어놓았다.

참다참다 "그게 뭐야! 말도 안돼!" 라고 불만을 터뜨리면 아줌마는 늘

"이정이가 어른이 되면 세상에 말이 안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걸." 이라며

알쏭달쏭한 대답으로 마무리하곤 했는데

아줌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나만은 아닌듯 했다.

엄마에게 물어봐도 아줌마 이름은 알 수가 없었고,

엄마가 아빠에게 아줌마 얘기를 할 때에도

"잘은 모르지만." 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아줌마는 모두에게 자신의 얘기를 아끼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새 아줌마는 동네아이들에게 으쓱대고 싶을만큼 멋있었다.

분명히 몸빼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걸레질을 하고 있어도

다른 아줌마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준구아줌마와 별다를 바 없는 빠글머리에 화장끼라고는 하나 없는 얼굴이었는데도

메주아줌마에겐 무언가 힘이 있어서

아줌마 말에 말대꾸를 해보려다가도

왠지모르게 나는 말끝이 흐려지곤 했다.

우울하거나 찌푸린 표정을 짓지 않는 아줌마와 지내면서

나는 걱정스런 맘에 아줌마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사라졌다.

그 때에는 그저

멋있는 아줌마로 여겼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메주 아줌마는

우아했고 따뜻했고, 무엇보다 지혜로웠다.

메주아줌마에 대한 기억이 다른 아줌마들처럼

그녀들의 힘든 사정이라던지, 안타까운 사건사고가 아니라,

아줌마에게 털어놓았던 나의 비밀들이 대부분인 이유는

아줌마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메주아줌마는

품위있는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 품위는

차림새도, 직업도, 돈도 아니었다.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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