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을꾸다 May 24. 2022

바지에 구멍이 날 때까지 입는 날이 오다니.

옷장 앞에서 망설임이 줄어든 이유


  옷을 잘 입는 편은 아니다. TPO라고 하는 시간, 장소, 경우에 맞게 입으려고 노력할 뿐. 사실 그것도 어렵다. 다른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나도 저렇게 입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찾는 일도 어렵다. 씻을 때를 제외하면 옷을 벗고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을 만큼 속옷, 잠옷, 실내복, 외출복 등 옷은 늘 나와 함께 한다. 그래서일까 옷 정리는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이고, 누구나 그렇듯 옷장에 옷은 가득하지만 입을 옷은 없다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많은 수의 옷보다는 기본적인 몇 가지 옷으로도 다양하게 맞춰서 입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티셔츠, 바지, 원피스, 셔츠, 치마 등 옷을 입다 보면 갖고 싶은 옷 종류도 많아지는데, 얼마나 많은 종류의 옷이 있어야 잘 맞춰서 입고 그 수를 만족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자주 입는 옷은 정말 한정적인데 말이다. 차라리 교복을 입고 다니면 편하겠다 싶을 만큼 출근 또는 외출 전 옷을 고르는 일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잘 어울리거나 예쁘다는 말을 들었던 옷이나 추억이 깃든 옷은 더욱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입지 않은 지 오래되었거나 몸에 맞지 않게 된 옷도 내 옷장에는 늘 자리 잡고 있었다. 휴직하면서 기존에 지내던 아파트를 떠나기 전 옷 정리를 하면서 20살 때 입던 코트를 드디어 비웠다. 그 코트는 내 눈에도 괜찮아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입지 않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하지만 추억이 깃들었다는 이유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딱히 중요한 추억이 있는 옷도 아니었고, 추억이 있었다 한들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 식으로 쟁여두기만 했던 묵은 옷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몇 상자인지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미국에 오는 짐을 챙길 때 옷을 얼마만큼, 어떻게 챙길 것인지 기준을 세우기 힘들었다. 9월 말에 도착하면 가을이었지만, 이곳은 겨울도 빨리 찾아오고 매우 길며 몹시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고 해서 두꺼운 양말, 겨울 외투, 기모가 들어있는 바지와 티셔츠 등 겨울옷을 몇 벌 챙겼다. 남편 옷도 내 옷도 아기 옷도 많이 챙길 만큼 짐 가방이 여유롭지 않았기에 최대한 종류를 골고루 챙기되 최소한만 챙겨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옷은 기부 또는 나눔을 하거나 헌 옷 수거함 또는 일반쓰레기로 처리했다.




  미국에 온 뒤로는 옷 몇 벌을 잘 돌려 막아가며 입었다. 작은 옷장에 남편 옷과 내 옷을 다 걸어도 공간이 남을 만큼 옷이 많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오히려 챙겨 온 옷들도 입는 것만 입게 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을 정도로 옷의 수가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동안 옷이 없다고 느끼고 옷을 더 사고 싶다고 느꼈던 내 마음은 왜 그랬나 싶을 만큼. 즐겨 입는 티셔츠와 바지 3-4개 만으로 충분히 계절 하나가 지나갔다. 외투도 신발도 하나면 충분했다.



  몇 안 되는 옷을 자주 돌려 입으니 처음 겪어보는 경험도 했다. 실내복으로 입는 바지 2개와 외출복으로 입던 바지 1개가 무릎에 구멍이 난 것이다. 바지에 구멍이 난 것도 처음인데,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 3개나 그렇게 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구멍이 났다고 해서 비우지 않고 바느질로 구멍을 메워서 계속 입고 있다. 옷이 해질 때까지 입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신발도 옷도 양말도 뭐든지 새로 사는 건 쉬웠다. 그런데 옷을 사지 않기 시작하니 오히려 옷을 사는 것이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니멀한 옷장을 만들기 위해 계절 하나에만 입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게 된다.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이것저것 옷을 맞춰본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지 않고 나에게 잘 맞고 단정하며 TPO에 맞는지 고민한다. 쉽지 않지만 하나씩 도전하면서 옷에 대한 욕심을 버려본다. 

이전 07화 벽돌 하나로 시작된 만리장성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