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그늘 아래서

오분 간, 나희덕

by 채송화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기다림은 작정을 하는 것이다.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을 기다림이 있을까.


한 동네 사는 언니는 저녁이면 산책하자고 가끔 전화한다. 우리 아파트와 언니네 아파트 사이에 방죽과 공원과 주민센터와 물놀이터와 체육시설들이 몰려 있다.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운동도 하고 개들과 산책도 한다. 알고 지내는 개들도 많다. 유자, 보리, 메리를 만나면 이 개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가장 덩치 큰 리트리버 유자는 벌렁 눕기부터 한다. 날렵한 보리는 아낌없이 몸을 내준다. 속정 깊은 스피치 메리도 양껏 껴안게 먼저 다가와 준다.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개의 몸은, 그 짧은 순간에도 우주적 위안을 준다.


그렇게 웃고 감탄하며 산책을 마치고 가다 보면, "저기 제부 아냐?" 언니가 먼저 남편을 알아본다.

시를 외우며 길에서 서성이는 남편. 먼저 우리를 알아채지는 못한다.

"그래도 늦었다고 마중 나오는 거 보면 참 멀쩡하다 야."

언니는 남편한테 나를 인계하고 신호등에서 돌아간다.


책 읽고 있지 왜 나왔어.

읽었지.

일기는 썼어?

썼지.


아무리 봐도 부부의 대화는 아니다. 아들의 숙제를 체크하는 엄마다.

남편은 아들이 된 걸까. 문인화 첫 수업에 길도 잃어버리고, 새로 산 준비물도 잃어버리고, 집에 올 때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 쓴 남편의 일기. 마지막 줄을 봤다.

-집에 돌아왔다. 아내가 있다. 마음이 놓인다.-


예전에는 남편이 나한테 그런 존재였다.

내가 어디서 뭘 하다 오든, 집에 오면 남편이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그랬었다.

집에 돌아온 나도 그 모습에 마음이 안정되었었다.

수학여행 갔다가 집에 와서 엄마를 봤을 때 드디어 드는 안락한 느낌.

집이 곧 엄마다. 엄마가 곧 집이다. 그게 친정이다. 친정은 엄마다. 더 이상 나는 친정이 없다.

엄마도 친정도 없는 나한테 남편은 엄마고 친정이었다.


남편은 이제 나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나는 아직 그런 맷집은 없다.

내가 언니와 산책하고 집에 갔을 때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책 읽고 있는 남편을 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언제 오나 중간지점에서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는 남편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정을 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기다림은 작정을 하는 것이다. 무작정 기다림은 없다.


연애할 때는 무작정 같이 있고 싶었다. <사노라면>을 부르며, 비가 새는 작은 방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둘이 한 집으로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우리는 둘이 한 집으로 들어간다. 꿈을 이루었는데 왜 고단할까.


남편한테 나는 집이다. 소라게가 몸을 쏙 숨길 수 있는 그런 소라, 껍데기.

그런데 소라게는 껍데기 안에 숨으면서도 그 집을 짊어지고 다닌다.

나도 그렇다. 남편이 치매에 걸려 이제 껍질뿐인 것처럼 변했는데, 여전히 나는 그 껍질로 남은 남편을 등에 지고 살아야 한다. 그가 더 이상 집이 되어주지 못해도, 나는 그의 집이자, 그 껍데기를 떠메고 가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다. 소라껍데기이자 소라게인 나.

나는 남편의 집이면서 동시에 그 집을 지고 가는 게가 되어버렸다.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