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해? 사랑해!

10년 만의 워킹데드

by 채송화

"바깥으로 나가면 끔찍하게 잠깐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CDC질병통제예방센터' 박사가 최후에 한 말이다.

아마 내가 제일 먼저 잡혀 먹혔겠지만, 그때까지 살았다면 나는 CDC에 남아서 죽는 것을 택할 것 같다.

<워킹데드>는 십 년 전에 봤을 때도, 십 년 후 지금 다시 볼 때도 생각이 많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에 끌릴까?


소크라테스가 봤다면,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봤다면, "독화살이 박혔는데 누가 쐈는지 독성분이 무엇인지 아는 게 급한가?"

당장 살아내는 게 급선무라는 말을 그리 돌려했을 것이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어딘가에 있을 실낱 같은 희망을 찾아가는 주인공, '릭'을 따라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지 숨 돌릴 틈도 없이, 살아나려 애쓰는 모습만 긴박하게 보여주는 것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한다. 감옥에 갇혀 서도 노래를 부르고, 상처를 알기에 꽃을 주기도 한다. <워킹데드>가 재밌는 건 삶의 공감이 많아서 인지도 모른다. 당장 하루치의 생존 앞에서도, 인간의 본능은 "왜?"를 향하게 되어있다. 원인은 무엇인지, 치료책은 무엇인지. 보는 내내 또는 보고 나서, 각자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주기 때문에 보는 것은 아닐까.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나. 내 삶을 상징과 개념으로 바꾸는 작업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인간에게 희망이란 무엇일까. 신의 또 다른 이름일까.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일까. 멸망 이후에도 희망을 생각하다니. 인간의 생명력은 참 대단하다. 그러니, T. S. 엘리엇은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했나 보다.


나한테는 희망이 있을까? 남편의 치매는 낫는 병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좀비가 다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가 죽은 자의 부활을 말했다지만, 좀비의 형식은 아닐 것이다.

나한테 희망은 <워킹데드>에서, 좀비가 다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농장주 허셸의 헛된 믿음 같은 것이다. 모든 인간이 좀비 보균자라는 드라마적 반전이, 모든 인간이 치매 보균자를 갖고 있다는 현실의 반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희망이 없는 나는 살아갈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그럼에도 나는 찾는다. '나아지는 남편'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을 돌보고 있는 거라고 우기며.

희망이 없어도 사랑은 남는다고. 그리고.

그 사랑이, 가장 고독한 절망의 순간에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고.

한계가 명확한 육체의 그릇은 외면하고,

마음의 그릇은 우주처럼 팽창한다 고집부리며,

외부의 힘에 밀리지 않으려, 나를 지탱할 내부의 실낱을 놓지 못하고 있다.


"신체가 시체가 되어도 남는 영원한 어떤 것"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남긴 수수께끼를,

'사랑'이라고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