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앞 붉은 칸나

꽃이 있던 자리, 꽃으로 기억하는 주소

by 강승숙

빵집 앞에 붉은 칸나가 피어있다. 칸나는 열대 식물처럼 키가 크다. 진초록 이파리에 적도처럼 뜨거운 빨강은 볼 때마다 발길을 붙잡는다. 그냥 지나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매번 스마트폰을 열어 칸나를 찍는다. 볼 때마다 찍는다.


칸나를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서른 살 여름이다. 그 시절 나는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환경부장을 맡아 야생화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우리 들꽃으로 화단을 가꾸겠다는 일념으로 한택식물원까지 찾아가 꽃을 구했다. 요란하게 애를 쓴 끝에 매발톱, 할미꽃, 초롱꽃 같은 꽃을 화단에 심었다.


한참 그러고 있을 때 교장선생님이 의견을 냈다. 교무실 앞 화단 한 칸에 통째로 칸나를 심자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화처럼 보이는 칸나, 들꽃하고 달리 너무 강렬한 분위기의 칸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들꽃을 더 심자고 했지만 옥신각신 끝에 물러서고 말았다. 구닥다리 교장선생님 때문에 들꽃으로 화단을 완성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속상했다.


여름방학이 지나 개학이 다가왔다. 칸나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1층 교무실 문을 열었다. 순간 창가를 보고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비와 뜨거운 햇볕 속에서 칸나는 거인처럼 자랐다. 교무실 유리창을 커튼처럼 가리고 있었다.


초록 이파리 끝에는 빨강 칸나가 수십 송이 피어있었다. 초록과 빨강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상상을 넘어섰다. 초록과 빨강으로 이 이상 아름다운 걸 만들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교장선생님이 칸나를 심자고 한 까닭을, 한두 포기가 아니라 밭 가득 심자고 한 까닭을 알 거 같았다. 교무실 유리창을 통해 본 칸나 꽃밭은 풍경화 연작이었다. 잊히지 않은 꽃밭이었다.


빵집 앞 칸나는 화분 두 개에 심어있었다. 화분 두 개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칸나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칸나 한송이만으로도 오래전 교무실 창을 가득 채웠던 붉은 칸나를 기억할 수 있었다. 빵집 앞 칸나를 볼 때면 언젠가 마당에 칸나 꽃밭을 만드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내게는 언젠가 꼭 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꽃 목록이 있다. 털여뀌도 그중 하나다. 털여뀌를 처음 본 것은 충북 단양이다. 남편과 단양천에서 물놀이를 하다 출출해서 인근 가게로 올라갔다. 이십 년 전 일이다. 가게 앞에 펼쳐놓은 파라솔 아래서 남편과 나는 간식거리를 먹으며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맞은편 담장 부근 익숙한 듯 낯선 꽃이 눈에 들어왔다.


꽃을 보는 눈이 유난히 밝은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길 건너, 그리로 갔다. 분명 여뀌를 닮았는데 이렇게 큰 여뀌는 처음이었다. 궁금해서 가게 주인에게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서성이다가 골목에서 나오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역시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지금처럼 식물 이름을 알 수 있는 앱이 없던 시절이라 모르는 식물 이름을 알려면 꽤나 품을 들여야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겨우 이름을 알게 되었다. 털여뀌였다. 줄기에 털이 많아서 털여뀌라고 부른다는데 생긴 모양에 비해 이름이 이쁘지 않았다. 더 아름답고 풍성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름도 있었다. 노인장대. 이 이름 역시 아쉽다. 노인이라니......


털여뀌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여뀌 이름은 여뀌뿐이었다. 이 풀은 어릴 때부터 도랑에서 보아오던, 소꿉놀이에 쓰던 풀이다. 흔하고 익숙하고 정겨운 풀인 것이다.


단양천 부근에서 처음 본 여뀌를 다시 본 곳은 춘천 중앙 시장 입구, 곡식 파는 가게였다. 가게는 곡식뿐 아니라 꽃집이라 여길 만큼 화분이 많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비좁은 입구 평상이나 아래에 화분 수개를 놓고 가꾸고 있었다. 그 속에 털여뀌가 있었다.


단양천 이후에도 드물지만 털여뀌를 본 적이 있다. 아쉽지만 그냥 지나치는 길에서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늘 다니는 시장 입구다. 털여뀌는 여전히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붉은 깨로 쓸 수 있을 거처럼 깨를 닮은 이삭도 이쁘고 휘휘 버들처럼 가지가 늘어지는 것도 그저 친숙하고 정겹다. 이번에는 씨앗을 받아놓을 셈이다. 주인에게 어쩌다 털여뀌를 심게 되었는지 꼭 물어볼 생각이다.



이번에 털여뀌를 더 알아보면서 여뀌 속이 마흔 개 가까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뀌라는 이름이 들어간 풀만 해도 가는 개여뀌, 가시 여뀌, 개여뀌, 기생여뀌, 긴 화살 여뀌, 끈끈이 여뀌, 대동여뀌, 만주겨이삭여뀌, 바늘 여뀌, 바보 여뀌, 봄 여뀌, 산 여뀌, 새 이삭여뀌, 세뿔 여뀌, 이삭여뀌, 장대 여뀌, 흰여뀌, 버들겨이삭여뀌, 솜흰여뀌, 큰 끈끈이 여뀌 등 이렇게 많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어떤 모양인지 찾아볼 생각이다.


오래된 친구는 만나면 편하고 자꾸 보고 싶어진다. 꽃도 마찬가지다. 오래전 인연을 가진 꽃은 사람처럼 정이 들고 그리움이 생긴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진다. 칸나와 털여뀌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꽃이지만 둘 다 기르고 싶다. 마당에 키우면서 오래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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