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욕구, 그리고 다산의 "원욕"

by 남상석

우리는 흔히 욕심과 욕구를 같은 뜻으로 쓴다.
“이번 학기엔 꼭 1등 하고 싶다”는 다짐, “내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소망,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런 마음을 두고 사람들은 쉽게 “욕심”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 욕심과 욕구는 다르다. 욕심은 필요를 넘어선 과잉된 바람으로, 끝을 모르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욕구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에너지다. 음식, 안전, 관계, 성취 같은 기본적 필요에서 비롯되며 본래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톨스토이의 농부 ― 욕심이 부른 파멸

이 차이를 잘 보여 주는 예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이다.
농부 파훔은 처음에는 가족이 살아갈 땅을 원했지만, 점점 더 많은 땅을 가지려는 욕심에 사로잡힌다. 어느 날 그는 한 유목 민족으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아침에 출발해 해가 지기 전 돌아오기만 하면, 그가 걸어 돌아온 만큼의 땅을 모두 주겠다.”
파훔은 끝없이 달렸고, 결국 지쳐 쓰러져 죽고 만다.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 세 아르신(약 2미터)의 땅일 뿐이었다.”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바람은 원욕이자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그것이 과잉되면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ChatGPT Image Oct 6, 2025, 06_58_13 PM.png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바람은 원욕이자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그것이 과잉되면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준다.

다산의 원욕 ― 삶을 움직이는 힘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이 말한 “원욕(願欲)”은 어디쯤에 위치할까?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은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을 설명하면서 “원욕”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이 욕심이 없다면 천하만사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한 “욕심”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바람, 곧 원욕을 뜻한다. 다산은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백성이 이(利)를 좇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름과 같고, 해(害)를 피하려는 것은 불이 습기를 피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욕구와 원욕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힘이라는 뜻이다.

물론 다산은 모든 욕심을 긍정하지 않았다. 재물에 집착하는 탐욕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소박한 바람, 안전을 구하고 삶을 지탱하려는 마음, 곧 원욕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하고 공동체를 바르게 세운다고 보았다.

원욕과 욕심의 경계

요컨대 지나친 욕심, 즉 탐욕은 부정적이지만, 원욕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바람이다. 원욕은 심리학자 매슬로가 욕구 단계에서 말한 “필요”와 닮아 있다.

먹고 자는 생존의 욕구, 안전에 대한 바람, 인정과 성취, 더 나아가 자아실현까지―이런 흐름을 다산은 이미 200여 년 전에 “원하고 구하는 힘”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 구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동산 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국민의 주거에 대한 원욕은 정책이 반드시 보장해야 할 정당한 바람이다. 하지만 집값 상승에 기생하는 투기적 탐욕은 사회 전체를 해치는 병폐다.
성취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원욕이지만, 그것이 과잉되면 부정행위나 극단적 경쟁으로 변질된다.

다산의 지혜 ― 욕심을 다스리는 길

욕심, 욕구, 원욕의 구분은 단순한 용어 풀이가 아니다. 욕구의 에너지를 어떻게 구분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도, 사회의 제도도 달라진다.

다산이 말한 원욕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바르게 다스리는 지혜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욕심을 길들이는 일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심을 끊는 기술이 아니라, 원욕의 방향을 올바로 세우는 통찰이다. 그것이 다산이 남긴 가르침이며, 지금도 유효한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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