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드시 끊는다는 건 아니고요.
#1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강아지에게 밥을 준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같은 행동을 했는데, 밥을 준 기억이 없다. 밥을 다 먹으면 입 주변에 혀를 놀리는 강아지를 보며 겨우겨우 기억을 재생했다.
#2 별도로 완충된 배터리를 충전기에서 뺐고, 충전이 필요한 배터리를 핸드폰에서 분리한 후 서로 교체했다. 분명히 신중하게 교체한 듯한데, 같은 자리에 같은 배터리를 끼웠다. 한두 번이 아니다.
#3 나를 길게 보고 살아온 아내는 나의 술 마시는 횟수가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열흘 내지 보름에 한 차례 정도니까. 그 열흘 내지 보름에 한 차례 정도 마시는 술자리에 서너 차례 연속으로 함께 한 사람들은 나를 술꾼으로 안다. 나는 절대 술꾼이 못 된다.
#4 ‘다음 날 깨어나 얼마나 마셨는지, 누구랑 마셨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게 진짜 술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어 다소 위안이 된다. 술 마신 다음 날 차를 지상에 두었는지, 지하에 세웠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한두 번이 아니다.
#5 술 못 마실 때 취한 사람 심정을 알지 못했다. 늦게 술을 배웠다. 취한 사람 심정을 이해했다. 술이 수리수리마수리 요술을 부렸다. 나의 얼굴은 술 안 마실 때와 술을 마셨을 때 두 개로 분리됐다. 두 얼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술을 마시고 나면 반드시 손해를 보았다.
#6~7년 전, 연세가 지긋한 재야 서예가 한 분을 뵈었다. 그 분 서재에서 음주 특강을 들었다. “酒라는 건 ‘물수 변’에 ‘닭유’야. 왜 그런 줄 아나? 첫째, 병아리가 물을 먹을 때 찔끔 마시고 하늘 한 번 보고, 찔끔 마시고 하늘 한 번 보네. 모름지기 술이란 그렇게 먹으라고 있는 거야. 원샷을 하지 말라 이거야. 둘째, 酒에 왜 ‘닭유’가 있는지 아나? 酉시 이전에는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거지. 오후 7시 이전에 술을 마시면 낮술이라 하고, 인사불성으로 애비도 못 알아보게 된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조금씩 천천히 밤에 석 잔 술만 마셔도 충분한 게 술이라네.” 이 특강을 왜 잊고 살았던가!
#7 술에 취해 전화기를 든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아야 한다. 취중 전화질 문자질은 간혹 비슷한 술꾼에게는 통하나, 맨정신 이성주의자들에겐 여지없이 불화살로 돌아온다. 취중 언행이 침소봉대 되어 후폭풍까지 불게 되면 진실이 왜곡돼 인격은 없다. 반드시 끊어야 한다.
#8 밝힐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이 더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술은 백해무익이다. 그래, 안다! 안다고! 그렇게 자인하면서 몇 해가 더 지났다. 기필코 끊어야 한다.
#9 내게 음주 멘토인 스승님께서 크게 아프시다. 문병 때 그러셨다. “어디 술 때문인가, 스트레스 받지 말게!” 그러자 옆에 계신 교양 넘치는 사모님께서 돌직구를 날렸다. “지랄하구 자빠졌네!” 가슴에 깊게 새겼다.
#10 내게 할 일이 생겼다. 술 대신 차를 마셔야 한다. 술 마시는 시간 대신에 책을 읽어야 한다. 술 마신 후 허덕이는 시간 대신에 세상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교장’이 될 것이다. 나는 2013년 4월 24일부터 술을 끊는다. 오랜만에 크게 웃는다. 우하하하하하하하!!!!!!!!!
# 내 생에 참 고마운 스승님들이 있다. 내 고3 때 나를 나답게 성장시켜 주신 김성현 선생님, 내가 힘들 때 선생님의 자취로 나를 위로해 준, 독서를 좋아하신 오병덕 선생님, 교무회의 때 서류를 내팽개치며 18년 교장에게 대들었던, 정의의 화신 유병희 선생님... 내 막내딸 이름을 지어 주시고, 교단을 떠나시며 교편(오죽)을 물려주셨던, 우리 대신의 국화쟁이 한호웅 선생님의 그 자비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