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8
아침에 아내가 딸아이 유치원을 보내려고 서랍에서 옷을 꺼내 놓자 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또 이 옷...”
아내는 벌써부터 옷타령이냐며 타박을 한다. 입을 댓 발 내밀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딸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벌써 이렇게 커서 옷타령도 한다한 편으로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딸은 요즘 레고 놀이에 푹 빠져있다.
오래전부터 새로운 레고 세트를 사달라고 조르지만 엄마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그래서 응용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매뉴얼 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것저것 다르게 조합을 해서 다른 모양의 완성품을 만든다.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 신기하고 기특하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갔다. 선명한 날씨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가을 날씨다. 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런 날씨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 싶다. 간식으로 싸왔던 바나나 향이 코를 자극한다. 상쾌한 숲 속의 아침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건조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감성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감상적인 것 말고 감성적인 것.
한 동안 잠잠했던 딸이 지독한 감기로 고생을 하고 있다. 기침이 심하다. 이틀째 자다가 토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보고 있는 나와 달리, 담담하게 검은 비닐봉지를 가져와 딸의 토를 받아내는 아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찡해온다.
딸은 새벽이 돼서야 기침을 멈추고 잠이 들었다. 주말에 나들이를 가지 말았어야 했다. 딸이 감기 기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외출을 한 탓에 더 심해진 것 같다. 원칙을 깨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결과도 좋고 마음도 불편하지 않다.
토를 다 받아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딸아이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내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럽다. 아내에게 이미 이런 것쯤은 일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상투적인 위로를 해보지만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는가 보다.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여보, 미안하고 고맙다'
*사족
한 때 내가 아내보다 육아를 더 잘하고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딸의 토를 조건반사적으로 받아내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을 청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한 사랑은 아내의 사랑에 비해 백분의 일도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