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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Oct 28.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11 화. 남자의 제안

 서영과 윤기는 방바닥이 따뜻한 전기패널이 들어오는 식당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시켜놓은 해물탕이 나오자 윤기가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서영은 아무 말하지 않고 남자가 따라주는 맥주의 잔에 거품을 바라보았다. 식당의 방바닥의 온기가 손바닥을 자꾸만 바닥에 대개 만들 정도로 바닥이 뜨거워졌고, 윤기는 연거푸 두 잔이나 맥주를 마셨고, 그 사이 서영은 두 모금의 맥주를 마셨다. 서영은 약간의 술을 마시기는 해도 술에 취해 보거나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신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 이상은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서영 씨는 술은 안 좋아하시나 봐요?"

"네, 술을 즐기지는 않아요. 어쩌다 와인 한잔 정도 마실 정도지요."

"그렇군요, 저는 술을 무척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해서 문제지요. 그렇치만 남들하고는 잘 마시지를 않아요. 주로 혼자서 밤에 작업 끝나고 마시는 편입니다."

"아, 네. 혼자서 술 마시다 중독되시는 건 아닌가요? 저희 아버지도 가끔은 혼자서 술을 드셨던 거 같은데, 그림 그리시던 분치 고는 사실 술을 잘 안 드시는 것 같기는 했어요."

"네, 선생님은 술은 거의 안 하시는 편이셨죠. 젊어서 병원에 의사로 계실 때는 많이 마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오히려 그림을 그리고 나서는 오히려 술을 많이 끊으시고 사셨고,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으시다 보니 술을 잘 안 하셨지요. 화가들도 만나면 다 술자리 먼저 벌이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저나 선생님은 그런 분위기는 안 좋아해서 화가들의 술자리는 잘 안 나갔지요."

"아버지는 젊어서는 술을 마시면서도 죄책감을 많이 가지신 걸로 알고 있었어요. 엄마가 술 한 모금도 안 마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고, 외할아버지가 목사님을 하시다가 보육원을 하셨던 분이시라서 아버지를 엄하게 기르셨는데 의사를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나 친구들과의 자리가 술을 마시게 했던 걸로 알거든요."

"서영 씨한테 제가 술은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런데 혹시 그림을 그려볼 생각 없으세요? 소질이 다분히 있으실 거 같은데."

"그림요?"

"네, 절 필요로 하시면 제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는 시간을 내드릴 수 있어요. 선생님 화실이나 제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우신다고 하면 기초 정도는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어요."


 서영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윤기라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흘리던 한 시간 전에는 상대방에 대한 어떤 것도 크게 의식을 하질 못했었다. 그가 아버지의 제자라는 생각도 아니면 처음 만난 남자라는 생각도 깊이 있게 생각하기보다는 그 남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했고, 그리고 자신의 슬픔이 예기치 않게 눈물로 드러나며 어찌할 수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강윤기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서영은 어떤 운명의 강한 끈이 풀어지는 소리가 탁하고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강하고 큰 힘의 소리처럼 그녀의 마음을 온통 흔들었다. 


 서영이 강윤기의 작업실을 찾아간 것은 바다에 다녀와서 일주일이 지난 후 목요일이었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 흰 눈이 쌓여가는 숲길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작업실을 찾을 수 있었다. 목조 건물처럼 지은 큰 창고형의 작업실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쳐 있었고, 작업실 마당에서 보이는 낮즈막한 산들의 모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영은 처음으로 한국의 산의 형태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하고 다시금 놀라움과 감탄을 지어냈다. 강윤기는 팔짱을 끼고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서영이 차에서 내리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없는 그 인사법이 서영에게는 한그루의 고독한 나무가 자기에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서영은 남자를 따라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산의 시간은 오후 두 시를 가르치며 햇살에 눈부신 몸을 녹이고 있었다. 산은 낮으나 높으나 나무를 키워내며 풀들을 자라게 쓰러지게 하며 돌과 바위를 견디게 했다. 그리고 골짜기마다 이름 모를 꽃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오늘은 산이 하얀 눈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는 순백의 절대미를 드러내는 시간이었기에 산은 진정 고요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그리고 서윤기라는 남자의 작업실에 피워진 장작 난로에는 양은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쉬지 않고 보글댔다. 서영은 난로 앞에서 남자가 끓여주는 커피에 목을 축였다. 


 차를 타고 달려오는 동안 상상했던 것보다 강윤기의 작업실은 훨씬 분위기가 고풍스럽기도 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이 살아 있었고, 그의 그림들은 그가 일찍이 유럽에서 인정받을 만한 화가로 손꼽힐 만큼의 실력자가 된 이유를 알게 했다. 남자는 처음에 봤을 때처럼 또 말이 없었다. 그저 몇 마디가 전부인 이 남자에게 그림을 배우려면 서영도 우선은 말보다 행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영은 차에서 가지고 내린 준비물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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