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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길주 Nov 04. 2024

장편소설    "노인과 유산"

12화. 산속에서의 3일

  강윤기라는 화백의 수업 방식은 이상했다. 그는 그림의 데생이나 소묘 같은 기초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하는 그림을 보기만 하라고 했다. 처음엔 무엇을 그리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감상하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했다. 참 이상한 수업 방식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서영은 가지고 간 물감과 캔버스 등을 펼치지 않고 그가 작업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난로에서 장작불이 피어오를 때마다 화실에 분위기는 밖의 날씨와는 상관없이 따뜻하고 서영이 직접 몇 번을 커피를 내려 마시고 탁자에 놓인 빵들을 조금씩 떼어먹기도 하고 노란 귤을 까먹기도 했다. 참 자유로운 수업이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 이상한 수업을 하는 화가의 수업 방식이 싫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자유롭게 그림에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그리는 그리는 그림은 이국적인 어느 도시의 겨울 풍경이었다. 그는 벽에 캔버스를 붙여 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별 다른 말이 없이 옆에 서영이 있다는 것도 의식을 하지 않는 듯이 자신의 그림에 집중했다. 한국의 산속에서 화가는 유럽의 어느 도시에 겨울을 그리고 있었다.

고흐의 작품 중에서 본 "밤의 카페 데라스" 같은 느낌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서영에게는 들 정도로 강윤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이국적인 카페의 풍경은 밤의 화려한 도심 속에서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겨울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외로워 보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하실 때 밤에 카페에 자주 가셨나요? 그림에 느낌이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네 가끔씩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실 겸 해서 나갔지요. 돈이 많지를 않아서 자주는 그런데를 가지는 못했어요. 전 결혼에 실패하고 유학을 떠났었거든요. 이혼한 거지였죠. 그래서 가난한 학생이었고, 오직 그림에만 미쳐있었거든요. 물감을 살 돈도 사실은 아버님이신 김박사님이 거의 다 대주셨었거든요. 그래서 저를 화가로 키워주신 분이 김박사님 이 시라는 거고요. 그분이 또 제 그림에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이신 화가이신 것도 사실이라서 저는 서영 씨의 아버님을 제 스승 중에서 첫 번째로 생각하는 분이셨어요."

"아, 저희 아버지가 물감값을 대주셨다고요. 저는 아버지를 잘 몰라서 한국에서 어떻게 사시었는지를 전혀 몰라요. 전 제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오빠들이나 저희에게 자신의 삶을 오픈하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해서 여자가 따로 있나 할 정도로 가끔은 아버지를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남을 도와가며 살았는지 모르겠네요."


 서영은 강윤기 화백이 이혼을 한 남자라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지만 그런 사생활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그리는 이국적인 카페의 그림에 사람들이 한 두 명씩 그려지는 걸 보다 보니 날이 서서히 저물며 어느덧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한 걸 서영은 보질 못했다. 창가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굵직한 눈송이가 하늘을 덮듯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저녁 6시가 넘어서였다. 서영은 아들 차웅이 학원에서 돌아와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을 시간임을 깨닫고 급하게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빨리 달리면 레슨 시간이 끝날 무렵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먹구름을 안고 알밤만 한 눈송이를 산자락에 들어붓고 있어서 앞이 잘 보이질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사람은 강윤기였다. 그는 자기의 실수로 이렇게 된 거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에 몰두해 있던 자신을 자책하며 서영에게 서영의 차를 두고 자기 차를 타라고 하고는 산에서 몰기 좋은 짚차형 차를 몰고 산자락을 황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가 산자락의 반쯤 내려왔을 때 더 이상 차가 달릴 수는 없을 만큼 눈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눈이 덮이는 산을 바라보고 둘은 차를 이곳에 버리고 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산속의 작업실에 다시 올라가야만 두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눈이 더 얼기 전에 다시 산을 올라가야만 했다.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움을 생각하면 차라리 올라가는 길이 낳을 것이고, 차가 달린 도로 위를 걸으면 그것이 눈 덮인 하얀 경사길을 걷는 것보다는 더 안전할 것 같았기에 두 사람은 얼른 차를 버리고 왔던 길로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서영은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운명이 실타래가 어디론가 풀려나간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하지 않고 신이 한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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