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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역에 도착할 수 있을까

기차속 프레임 밖으로 본 세상에 관하여

by 자유여행자

스무살즈음에 기차를 타고 몇시간이나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 적이 있다.

뚜렷히 어느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방학이 되자 결정은 나중으로 미룬 채 기차에 몸을 싣게된 것 뿐이었다.


해가 쨍쨍거리던 낮에 용산을 떠난 기차는

달리다가 다음역에 섰다가 다시 달리는 등

꾸준히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역은 경기도 즈음이었다가 조치원과 대전을 지나 경상도로 들어섰다.


무궁화의 느린 움직임을 따라가듯 해는 서서히 하늘 너머로 사라졌고 어둠이 이내 찾아오자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부산까지 도착해 여행을 계속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차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다음역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에서도 늘 다음역이 있는 것일까?



스무살때까지 남들과 똑같이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그때부터 느리게 달리기로 했다.


그동안 빠르게 달리면서 주변을 보지 못한건 아닐까 아쉬웠던 것인가.

나는 느린 무궁화호처럼 창밖의 풍경을 천천히 그리고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고

여러 활동을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운동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하고 싶던 공부도 맘껏 하면서

내 인생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주변 친구들은 모두 전역을 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뭐하나 처리한게 없는 학생이었다.


부랴부랴 군대부터 갔다.

늦게 시작했던 군생활에서 많이 의지하였던 친한 선임이 전역하자 문득 외로워졌다.


혼자 텅빈 체단실에 앉아 거울을 보며

나도 다음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음단계로 잘들 나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여기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


느리지만 나도 전역은 하게되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느리게 로스쿨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이미 친구들은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오래라

거듭 찾아오는 괴리감은 나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나도 수험생활을 끝내고 다음단계로 도달할 수 있을지 도서관을 가는 도중 하늘을 보며 생각했었다.


어찌저찌 수험생활도 마치고 남들이 이미 하고있던 직장생활을 나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친구들은 슬슬 결혼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단계는 끊임이 없이 다가오는구나.

나도 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오래된 생각이 또다시 나를 괴롭힌다.


스무살때 내가 선택한 길을 택하면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달리게 되었고

먼저 다음역에 도착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괴리감 속에 나를 던져놓곤 한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기엔 여기까지 오면서 바라봤던 풍경들 또한 큰 기쁨을 주었던 것 같다.

먼저 달려나갔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이 풍경들에 버금가는 장면들을 내 기억속에 남길 수 있었을까.



다시 스무살 때 기차를 막 타던 나에게로 돌아가 본다.


지금 무궁화호를 타게된다면 먼저 ktx가 도달한 역에 한참 뒤에 도착하게 된다고.

다섯시간동안 부산가는 기차에 허리아프게 있지말고 ktx를 타라고 설득해본다.

어차피 부산에 먼저가면 되는거 아니냐고 몰아붙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를 상상해도 그때의 나는 웃으며 무궁화호에 오를 것만 같다.


Ktx는 모든역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빠르게 달리면서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들과 무인역들을 볼 기회를 잃게 되고,

기차속에서 보는 프레임 바깥 세상의 배경이 빛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것도 모르지 않겠냐고 할 것만 같다.


결국 나는 돌아가더라도 느리게 삶을 진행시키게 될 것이다.



그 때 기차속에서 다음역이 있다는 생각 외에도 다른 생각들을 했던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프레임 밖에 보이는 세상이 다양하다는 것도 생각했고,

느린 기차더라도 언젠가는 다음단계에 모두 도달한다는 것도 생각했다.


윗 사진이 내가 그 당시 기차속에서 보았던

프레임 밖의 세상 중 하나이다.



결국은 도착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진 프레임들의 가치를 의심하지 말고 조금 더 다양한 프레임들을 수집하며 기다려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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