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역시 김치 그리고 떡

민재 미첼 mjmitchell

by 민재 미첼 MJ Mitchell

2. 역시 김치 그리고 떡.

노바스코샤 특산물 랍스터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배달민족 (우리 민족을 단국, 배달나라의 겨레라는 뜻으로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말의 원뜻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음식을 주문한 후 날라다 주는 '배달'이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살 때, 수많은 배달의 민족들은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한식, 분식, 중식, 양식, 일식, 치킨에 생맥주까지 전화만 하면 척척 내 집 문 앞까지 배달해 주었다.

게다가 흔한 엄마 찬스도 있었고, 동네마다 반찬가게가 즐비해서 나처럼 요리에 소질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맛난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시골로 (이민 초기 5년은 작은 마을 울프빌에서 살았다.) 이민을 오고 보니 당장 매 끼니가 큰 걱정이었다. 처음 몇 달은 여행 온 것 마냥 이것저것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탐구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맛나고 고급스러운 요리라도 먹고 나면 헛헛하고 더부룩했다. 그랬다. 쌀밥과 김치가 필요했다. 그러니 김치부터 담가야 했다.


한국에서 먹었던 김치는 모두 엄마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캐나다엔 엄마가 없다. 난감했다. 인터넷을 뒤져 막김치 만드는 방법을 받아 적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뭐든지 적당히 넣으라는 통에 나 같은 요리 무식자는 감히 따라 할 수 없어서 요리에 관한 조언만큼은 늘 인터넷 검색이 우선이다.


13.jpg 노바스코샤 마을 풍경

두말할 필요 없이 김치를 담그려면 배추가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 동네 마트에만 가도 배추는 물론이고 약간의 한국 식품을 팔고 있지만 이민 초기 ( 2009년) 시골 동네 마트에 김치 재료가 있을 리 없었다. 배추를 찾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차를 몰고 가야 했다. 더구나 찾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매일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빈손으로 와야 할 때도 있었다.

김치 담는 배추를 차이니스 캐비지 Chinese cabbage라고 부르는데 생김새는 한국 배추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한국 배추에 비해 속 줄기가 두껍고 단맛이 덜한 데다 푸른 잎사귀는 다 떼어 낸 크기가 작은 알배추다. 액젓으로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태국산 피시소스를 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늘, 생강, 파 등은 이곳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만 고춧가루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살 수가 없었다. 멕시코나 이태리 고춧가루는 가까운 슈퍼에도 있지만 한국 고춧가루는 먼 한인 마트에나 가야 구할 수 있었다. (2018년부터 소비스 Sobeys에서 한국산 고춧가루를 팔고 있다. 처음 진열대에서 한글이 적힌 고춧가루를 발견했을 때 충격적이었고 뛸 듯이 기뻤다.)

아무튼 동네 마트에서 팔지 않는 한국산 고춧가루를 나는 이민 초기부터 걱정 없이 쓸 수 있었다. 바로 엄마 찬스였다. 연로하신 울 엄마는 아직도 텃밭에서 고추를 직접 키우신다.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고추 농사만큼은 포기를 못한다. 나는 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전화 통화할 때 이따금 설전을 벌인다. 한인마트에서 사다 먹으면 되니까 내년엔 고추 농사짓지 말라고, 고춧가루는 여기에도 얼마든지 많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엄마는 해마다 내게 햇고춧가루를 보내주신다. 감사하게도 그 덕분에 지금껏 고춧가루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살던 나라가 바뀌니까 김치 한번 담가 먹는 것도 큰일이었다. 김치의 재료를 구하는 문제만 불편한 게 아니라, 집의 구조적 문제가 또 있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생각도 못해 본 문제였다. 캐나다의 주택 구조는 한국과 달라서 김치를 담기에 몹시 불편하다. 우선 배추를 절일 큰 대야(일명 다라이)를 구하기 어렵다. 설령 어렵게 대야를 구한다 한들 대야를 놓고 물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부엌의 개수대는 너무 좁고, 욕실은 건식이라 대야를 놓고 물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나처럼 좁은 개수대에서 절인 배추를 씻느라 고생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 거의 한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엄마가 김치를 담을 때 베란다에서 배추를 절이고 씻고 하는 장면을 보며 컸기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온 후, 배추 한 포기 씻을 수 없는 좁은 개수대에서 김치를 담을 때마다 마음껏 물을 쓸 수 있는 베란다 공간이나 습식욕실이 너무 그리웠다.

음식문화가 다르면 건축의 공간 구성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살면 이런 불편함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김치를 만들어 먹도록 적응해 간다.


10.jpg 핼리팩스 거리 풍경


맛 좋은 김치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갓담은 김치, 익은 김치, 신 김치, 묵은지 등 발효식품 특유의 '시간'이 주는 다양한 맛이 매력 중 하나이다. 게다가 배추김치, 깍두기, 파김치, 갓김치, 보쌈김치, 열무김치, 동치미, 섞박지 등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김치가 있다 보니 한국 사람인 나도 아직 맛보지 못한 김치가 너무 많다. 또한 김치는 여러 요리 재료와 잘 어울리는 양념 역할도 톡톡히 한다.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찌개, 묵은지찜 등 어떤 재료와 함께하든 그야말로 김치가 김치 한다. 김치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해서 냉장고에 김치가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면 한국 사람이 분명하다.

노바스코샤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김치 꽁다리마저 귀하게 여겼다. 이민 초기에 냉장고 구석에 김치찌개용 김치 꽁다리를 모아 두었었다. 김치는 다 먹고 꽁다리만 남은 상태였다. 때마침 남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갑자기 남편이 냉장고에서 김치 꽁다리 통을 꺼내더니 이게 바로 김치란다 하며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순간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생각해 보면 김치를 생전 처음 보는 그들은 그 김치 꽁다리들이 한국에서는 거의 음식물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 리 없겠지만 나는 그 순간 팔불출처럼 터무니없는 김치 부심을 내는 남편이 한없이 야속하고 부끄러웠었다. 바로 다음 날 나는 마트에 가서 작은 냉장고를 하나 샀다. 그 냉장고는 김치 꽁다리뿐만 아니라 오징어, 멸치, 젓갈 등등 온갖 한국의 향기를 뿜어내는 음식들의 신선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큰 냉장고 구석자리가 아닌 작지만 깔끔한 새 냉장고의 앞자리에 당당하게 김치 꽁다리통을 보관했다.


울프빌에 살 때 나는 남편 친구와 이웃에게 배추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 준적이 있다. 남편의 친구 C는 그때 배운 실력으로 꾸준히 김치를 담가 먹고 있다. 매년 여름, C는 남편을 초대해서 함께 배추김치와 오이김치를 담근다. 오이는 C가 직접 텃밭에서 길렀다. 오이김치 담그는 법은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 준 적도 없지만 엉성한 나의 설명만 듣고 그걸 받아 적어 가더니 남자 둘이 열심히도 만든다. C의 집은 우리 집과는 거리가 멀어서 김치 담는 날이면 남편은 C의 집에서 자고 온다. 마치 김치 파티를 하는 듯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그러 가고, 돌아올 때는 김치가 가득 담긴 통을 두어 개나 가져오니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해에 담근 오이김치는 너무 짰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맛이 좋아지고 있다. 남편과 C는 그들이 만든 김치를 너무너무 자랑스러워한다. 나 역시 김치를 사랑해 주는 남편과 C가 고맙고 자랑스럽지만 무엇보다 국제적으로 사랑받는 김치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나라 사람들이 김치 종주국을 탐내서 대한민국 김치를 자기 나라 음식이라고 우긴다는데 이야말로 김치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탐이 날 만큼 맛있는 김치다. 뽐내고 싶은 만큼 매력적인 음식이다. 역시 김치다!!


9.jpg MacKay Bridge in Halifax

- 떡보

내가 이토록 떡을 좋아했었나? 이민 온 후 나는 갑자기 떡보가 된 기분이다. 떡을 사 먹을 수 없으니 급기야 떡을 직접 만들고, 찌고, 두 겹으로 쌓아 쪄낸 시루떡을 아귀처럼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민 오기 전까지 나는 추석날 엄마의 지휘 하에 송편이나 빚어 봤지 단 한 번도 내 자발적 의지로 떡을 만들고 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민 와서 보니 엄마는 없고 떡을 파는 가게도 없었다. 역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민 온 후 처음 해 먹은 떡은 시루떡이었는데 처음 만든 떡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팥을 조금 태워서 탄내가 나는 시루떡을, 그것도 위는 살짝 설익은 시루떡을 허겁지겁 먹으며 목이 메었다.

두 번째로 도전했던 떡은 인절미였다. 인절미에서 가장 중요한 콩가루는 역시 엄마 찬스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한인마트에 가서 찹쌀을 사다가 밥을 했고, 조막만 한 돌절구에 찰밥을 콩콩 찧었다. 작은 절구지만 그나마 핼리팩스 시내를 다 뒤져 찾아낸 절구 중 최고 큰 것이었다. 절구에 한 번 찧어 봐야 두 입거리 만큼의 떡 덩어리가 나와도 그게 어딘가. 엄마가 보내준 콩가루를 듬뿍 묻혀서 입안에 넣으면, 입속에서는 고소함이 폭발했고 귀에서는 흥겨운 민요 가락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노동력에 비해 결과물은 적었지만 혀에서 느껴지는 행복은 노동의 수고를 잊기에 충분했다.

고맙게도 엄마가 콩가루를 많이 보내줘서 한인 친구들과 모여 인절미 파티를 하기도 했다. 찹쌀밥을 해서 절구 두 개에 나누어 담고 두 명이 절구질을 하고, 한 명은 떡의 틀을 잡아 썰고, 다음 사람이 콩가루를 묻혀서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한국 아줌마들 여덟 명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인절미를 만들어 맛나게 먹었다. 그날 우리의 인절미 파티는 모두에게 콩가루만큼 고소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처음 시도가 어려웠지 한 번 떡을 만들어 보니 자신감이 생긴 나는 여러 가지 떡 만들기에 도전해 봤다. 실패한 적도 있고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성공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엄마가 쪄준 호박고지 백설기, 향긋한 쑥버무리, 콩을 박아 아무렇게나 쥐었다 놓은 못생긴 콩떡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엄마가 해주는 떡이 너무 그리웠다. 그립고 그리워서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먼 이국땅에서 떡을 찐다. 남편은 끈적하고 물컹한 식감 때문에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떡 찌는 날 더욱 행복하다. 나 혼자 다 먹을 수 있으니까!

12.jpg 호숫가 풍경

글 - 민재미첼 그림 - 조현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