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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리》

35편 - 왜 이렇게 지칠까, 스스로에게 묻는 밤

by 정성균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창밖 어둠이 도시의 소음마저 잠재운 하루의 끝자락, 싸늘한 물 한 잔을 비우니 목을 타고 흐르는 차가움만큼이나 익숙한 질문 하나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요히 피어올랐다. '왜 이토록 지쳐 있을까.' 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음에도 마음은 텅 빈 듯 허하고 몸은 이유 없이 무겁기만 했다. 억지로 지은 미소 뒤편으로 서늘한 공허가 자리했고,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응고되어 숨통을 조여왔다.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고 맡은 일도 나름 해냈지만, 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처럼, 소중한 것들이 자꾸만 우리 곁을 스쳐갔다. 그 희미한 감각 속에 우리는 묵묵히 하루를 견뎌냈다. 회의가 끝난 오후, 식지 않은 커피잔 옆에 쌓인 서류 더미. 퇴근길, 습관처럼 들른 편의점 환한 LED 불빛 아래 거울처럼 비친 초점 잃은 내 얼굴. 그런 작고 익숙한 장면들 속에서, 문득 애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든다.


우리는 삶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있었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메시지는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밀린 업무는 쉴 새 없이 뒤쫓아왔다. 쉬는 시간마저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독서나 강의, 하다못해 뉴스라도 보며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만 마음이 놓였다. 휴식조차 완벽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수록 내면은 더욱 공허해졌다. 온몸은 무거웠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전체적으로 낡아버린 느낌이었다. 눈빛은 생기를 잃었고, 웃음은 어딘가 불투명해졌다. 분명 많은 것을 이루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정작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모든 걸 이룬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번번이 무너지고 있었다. 성공의 화려한 외피는 오히려 내면의 고통을 가리는 가면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나쳐 온 시간들. 멈출 수 없던 경주마처럼

과거 우리는 멈추지 못하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창문을 넘어올 때까지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고, 새로운 메시지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대로 쉬는 법은 점차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밤을 새워 얻은 성과보다, 그 대가로 흘려보낸 감정들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붙잡혀, 우리의 일상은 늘 긴장된 채 흘러갔다. 삶은 불빛이 약해진 긴 복도 같았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도 발걸음을 멈추면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라도 걷기로 했다. 그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빠르게 달려왔을까?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경쟁 사회의 일원으로 길러졌다.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대학, 더 나은 직장. 이 모든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양 주입되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앞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성공은 늘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정의되었고, 우리는 끝없는 경쟁의 굴레 속에서 헤매었다. 잠시라도 멈추는 것은 낙오를 의미했고, 휴식은 사치였다. 끝을 알 수 없는 경주였다. 어디쯤 종착지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도 속도를 늦추면 모든 걸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았다. 한겨울 새벽,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 위로 터벅터벅 발길을 옮기던 시간도 그랬다. 주말조차 반납하고 자기 계발에 매달렸다. "이 정도는 괜찮아", "조금만 더 하면 돼"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 종착점은 언제나 신기루 같았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육체는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고, 정신은 불안과 우울에 잠식되었다. 어깨는 뭉치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어느 날 아침에는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다. 온몸의 세포가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그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설 수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몸이 먼저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하나둘 줄였다. '이것까지 해야 완벽해'라는 강박을 내려놓았다. '무조건 열심히'보다는 '지치지 않고 오래가기'를 목표로 삼았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힘을 천천히 풀자, 손바닥 위로 비로소 우리 자신이라는 감각이 다시 피어올랐다.


방향을 바꾸는 용기. 삶의 전략을 다시 짜는 일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뭐지?" 그 질문은 굳어 있던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조용한 각성이었다. 차갑게 식은 벽난로에 작은 불씨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마음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온기가 피어났다. 그 순간부터였다. 애쓴다고 모든 것이 나아지는 건 아니라는 걸, 점점 더 뚜렷이 느끼기 시작했다. 진심은 때로 너무 뜨거워 스스로를 태워버리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늦게야 깨달았다. 우리 모두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을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순 없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이는 마음가짐의 변화를 넘어,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삶의 전략을 다시 짜는 일이었다.


이 깨달음은 심경의 변화를 넘어선, 삶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했다. 그동안 우리는 외부의 기준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삶의 방향을 설정해 왔다. 남들이 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따랐고, 남들이 성공이라 부르는 것을 좇아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을 지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삶의 전략을 완전히 새롭게 짜는 용기를 얻었다.


그 전략은 거시적인 계획표나 엄청난 목표 달성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리듬을 재조정하고, 우리의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지 묻는 과정이었다. 예전의 우리는 하루를 잘게 쪼개며 살았다. 쉬는 시간마저 '생산적'이어야 마음이 놓였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뭔가를 반드시 '의미 있게' 채워야 했다. 스스로에게 자주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조금만 더 하면 끝나." 그러나 그 끝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어디쯤 종착지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도, 속도를 늦추면 모든 걸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았다. 한겨울 새벽,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 위로 터벅터벅 발길을 옮기던 시간도 그랬다.


이제는 속도보다는 리듬을, 성과보다는 회복을, 외부의 인정보다는 내면의 평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나를 지키려는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무작정 소진하는 대신, 그것을 현명하게 관리하고 충전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잠시 멈춰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왔다. 이제는 그 신호에 귀 기울이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기로 했다.


멈춤의 미학. 더 많이보다 더 오래

결국 몸이 먼저 말했다. 어깨는 뭉치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어느 날 아침에는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다. 온몸의 세포가 동시에 외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그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설 수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몸이 먼저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하나둘 줄였다. '이것까지 해야 완벽해'라는 강박을 내려놓았다. '무조건 열심히'보다는 '지치지 않고 오래가기'를 목표로 삼았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힘을 천천히 풀자, 손바닥 위로 비로소 우리 자신이라는 감각이 다시 피어올랐다.


멈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발걸음을 멈추면, 그제야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의 움직임조차 눈에 들어온다. 조용히 마음을 기울이면, 내면 깊은 곳에서 오래된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바쁘게 달리느라, 삶의 작은 기쁨들을 놓치고 살아왔다.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멈춰서 그 순간들을 온전히 느끼고 경험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건, ‘더 많이’가 아니라 ‘더 오래’였다. 태도는 자세를 넘어, 삶을 운영하는 기술이었다. 우리 삶의 자원을 어떻게 회복하고 분배할 것인가. 그것은 노련한 항해사가 파도를 타며 터득한 고유한 항법과 같았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항해사와 같았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안전하게 지키고, 항해의 즐거움을 느끼며, 때로는 닻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이러한 변화는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매일 밤 지쳐 쓰러지지 않았고, 아침에는 활기찬 기운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의 능률도 오히려 향상되었다. 충분한 휴식을 통해 집중력이 높아졌고, 스트레스는 줄어들었다. 더 이상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트렌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변화였다.


애쓰지 않는 연습. 내면의 평온을 찾아서

오랜 바람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도록 따뜻함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강렬한 찰나보다, 오래 머무는 온기를 지닌 사람.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는 대신, 끝까지 걷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속도보다 리듬을, 성과보다 회복을, 외부의 인정보다 내면의 평온을.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나를 지키려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애쓰지 않는 연습은 일을 덜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쉬게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애쓰지 않는 연습의 일부다.


그래서 요즘엔, 일부러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날도 있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멈춘다. 땀 흘리면 성실한 줄 알았다. 바쁘게 움직이면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가장 그리운 순간은 예상외로 평범했다. 해 질 녘 창가에 앉아 마시던 미지근한 커피, 누구의 말도 필요 없던 고요한 시간. 그때 나는 비로소 ‘나’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었다. 그 시간은 거창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지켜준다. 혹시 당신은 요즘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너무 오래, 너무 열심히 애써온 것은 아닌가? 더 이상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찾아간다. 이는 우리의 삶을 외부의 혼돈으로부터 보호하고, 마음의 평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뿌리처럼, 우리 삶을 조용히 붙잡고 있는 내면의 무게였다. 변화무쌍한 바깥 날씨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깊이 내려앉은 그 감각 덕분이었다. 겉이 요동칠수록, 중심은 더 단단히 내려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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