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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사람 - 28화

문경 유곡

by 조성현

아름다운 길, 아름다운 사람 / 문경 유곡


4일 차(4월 9일)

문경 유곡 점촌북초등학교~영강길~불정역(폐역)~문경버스터미널~문경새재 도립공원 입구 23km / 누적 83km


도보 여행자가 아름다운 길을 만나면 피로가 가신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걷는 게 좋아서 국토종단을 한다지만 매양 좋을 수만은 없다. 따가운 햇볕을 가려줄 가로수나 그늘도 없는 길을 오래 걸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길을 벗어날 묘책은 없다. 그저 걸을 뿐이다. 장거리 도보여행이다 보니 걷기 좋은 길도 힘든 길도 만난다. 그러려니 하고 걸을 뿐이다.


문경 유곡을 출발하며 고개를 넘자 구불구불 내리막길에 키 높은 나무가 도열하여 객을 맞는다. 맞은편에는 개나리가 활짝 웃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교각과 4차선 문경대로 사이에 이 두 도로의 할아버지뻘 되는 옛길 유곡불정로가 구불구불 돌고 있고, 나는 그 길을 지나고 있다.

휘어지는 고갯길에 노란색으로 칠한 추락 방지용 시멘트 구조물도 예쁘다. 내 기분이 좋으니 모든 게 예뻐 보인다. 굽이치는 영강을 끼고 이웃한 도로에 나를 내맡긴다. 산은 병풍이 되어 강을 감싸 안는다. 강과 산과 내가 하나가 된다. 아름다운 길이다.


살아오며 누군들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 몸 고생 안 해본 이가 있을까. 나에게 한 사람 꼽으라면 A를 지목하겠다. 내 직속 상사이자 회사 최고위직까지 오른 사람이었기에 그의 독선에 항거도 못 한 채 몇 년간 많이 힘들었다. 세월이 흘렀더라도 그는 내가 받은 고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맞은 자는 평생 기억하지만 때린 자는 기억을 못 하는 게 인간의 속성 아닌가. 나도 기억에는 없지만, 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피장파장이다.


몇 년 전 하늘나라로 소풍 간 친구가 있다. 나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십여 년 각별하게 지냈다. 생업 전선에 뛰어들고 각자 가정을 이루며 자주 만나지 못하였지만 늘 마음속에는 그 친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에 착하고 순하지만, 불의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나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독학으로 인문학 지식을 쌓아 사고(思考)의 근본 방식을 파헤치는 나름의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 그는 현세의 꼿꼿한 선비였다. 조선의 선비가 처자식이 끼니를 걸러도, 땔감이 없어 겨울에 콧물이 고드름이 되어도 생업을 도외시하는 위선적 모습을 보였다면, 그는 처자식과 먹고살려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은 진정한 선비였다.


그런 사람을 하늘도 무심하지, 환갑 넘기고 몇 년 만에 일찍 데려갔다. 나는 영원히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 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가 어려움을 겪을 때 달려가지 않았다.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가슴을 친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우리 집에 찾아와 나에게 하모니카를 주고 갔다. 수십 년간 내 서랍에 보관 중인 그 하모니카를 가끔 꺼내서 불어 본다. 이십 대 초반, 그가 우편으로 보낸 연서 같은 여러 장 엽서가 그리움을 더한다. 아름다운 사람, 그의 이름은 ‘서긍하’다.


<오늘의 이모저모>


지나는 자동차도 드물다. 고개에서 내려다보니 자동차 전용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은 어디론지 정신없이 내빼고 있다. 이어 영강을 따라 이어진 철로 옆 호젓한 길로 접어들었다. 멈춰진 폐선로와 건널목 차단기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폐역 불정역 건물이 강 옆에 초라하게 서 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며 선로와 함께 불정역도 시간이 멈췄다. 제아무리 잘나도 그 또한 지나가리니. 지금 잘났다고 자랑질할 것 없다. 시간이 지나면 내려올 것이거늘. 정말 그럴까? 많고 많은 흙수저들은 통계 수치를 내밀며 고개를 흔들 것이다. 계층이동 사다리 중간에는 철조망이 겹겹이 처져 있어 부의 대물림이 고착화되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벚꽃이 뿌리는 꽃비가 내게 세례를 준다. 벗과 함께 벚꽃에 취해보고 싶다. 토요일이라 나들이 나온 몇몇 연인이 보인다. 청춘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는 소야 벚꽃 길을 거닌다. 서울의 지하철 열차 안에서, 서울시청 잔디 광장에서 남들이 보든 말든 입맞춤을 해대는 서울의 젊은이에 비해 이들은 얼마나 신선한가. 수채화 속의 주인공들 같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름의 차이일 뿐이다.


혼자 걸으면 온종일 말 몇 마디 하지 않는다. 걸으며 혼자 신나게 노래를 부를지언정,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긴 싫다. 이럴 때 지인을 만나면 만남의 기쁨이 배가된다. 선배 수필가와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만남의 기쁨이 컸다. 진솔하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큰 감동도 받았다. 육십이 넘어서도 끝없이 도전하는 그분들. 서로에게 무한의 신뢰를 보내는 두 내외.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더니 오늘은 두 분의 스승을 만났다.


내일은 문경새재를 넘어 1년 만에 다시 충청북도 땅에 들어선다. 제천 쪽이다.


20160409_094831.jpg 내 눈과 뇌리에 각인된 이 길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보일 수 없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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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9_103200.jpg 낙석의 피해를 방지하는 피암터널


20160409_104202.jpg 탄광이 문을 닫으며 지금은 폐역이 된 불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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