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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Sep 17. 2021

바이올린이 펼치는 성모의 일생

하인리히 비버의 <묵주 소나타>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하인리히 비버 - 묵주 소나타  

연주자: 레이첼 포저(바이올린)

레이블: 채널 클래식스


앞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을 여행했으니 이제 다시 도버해협을 건너 중부 유럽으로 가보려고 한다. 오늘 여행지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이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에는 모차르트 이전에 또 한 명의 천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인리히 비버(1644-1704). 뛰어난 기교를 구사한 천재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작곡가보다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것 같다.  


성 마르코 수도원 벽에 걸린 프라 안젤리코의 걸작 <수태고지>(1440-42)


하인리히 비버(1644-1704)는 지금의 체코 지역(보헤미아)에서 태어났고 생애의 대부분을 잘츠부르크에서 대주교의 악장으로 봉직하며 음악 활동을 했다. 비버가 남긴 <묵주 소나타>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바이올린 기법의 난해함으로 당대에서는 거의 이해되지 못한 잊혀진 작품이었지만 20세기에 들어 그 진가가 재발견되며 비버의 명성을 널리 알린 곡이다. 성모의 생애를 영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깊은 음악성과 까다로운 바이올린 기교를 모두 필요로 하는 곡으로 감정과 기교의 합일이라는 형식에 있어 바로크 바이올린곡의 백미라 할 만하다. <묵주 소나타>는 가톨릭에서 행해지는 성모의 기도를 바이올린과 통주저음 반주로 표현한 작품이다. 가톨릭에서 묵주의 기도는 묵주를 쥐고 규칙에 따라 성모의 일생에 대한 기도와 묵상을 올리는 기도인데 총 3개의 꿰미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아래 15단의 기도로 구성된다. 기도자는 15단의 기도를 진행하며 각 단에 해당되는 신앙의 신비를 묵상한다. 그 기도의 순서는 성모의 일생을 따르며 아래와 같다. 비버의 <묵주 소나타>는 이 묵주 기도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각 단의 제목에 맞는 바이올린 음악을 작곡했다.


환희의 신비
 - 1단 예수의 잉태, 2단 엘리사벳 방문, 3단 예수 탄생 , 4단 성전 봉헌, 5단 예수를 성전에서 찾음


고통의 신비
 - 1단 피땀 흘리심, 2단 매 맞으심, 3단 가시관 쓰심, 4단 십자가 지심, 5단 십자가에 못 박힘


영광의 신비
 - 1단 부활, 2단 승천, 3단 성령강림, 4단 성모 승천, 5단 천상의 대관식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답게 비버는이 작품에 까다로운 테크닉을 적용했다. 변칙조율인 스코르다투라(scordatura, 바이올린 현의 일부 튜닝을 달리해 연주)와 마치 두 개의 악기가 연주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 더블 스토핑(double stopping)이 그것이다. 스코르다투라 기법이 적용된 <묵주 소나타>를 정상적으로 튜닝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면 이상하게 들리는데, 초기 이 곡의 해석자들을 그런 특성을 모르고 연주해 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그런 점 때문에 이 소나타가 몰이해 되었지 았나 싶다. 스코르다투라 기법을 통해 비버는 표제에 담긴 음악적 깊이를 최대한 표현할 수 있게 표현적 영역을 확장할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곡에 깃든 불길함, 순진함, 생생함 등 다양한 감정을 더 정교하게 그릴수 있었다. 13곡 성령 강림에서 활용된 더블 스토핑 역시 현을 강하게 긁어대며 수난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연출 효과를 낸다. 비버는 이런 기법을 통해 성모 일생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묵주 소나타>는 예수의 잉태부터 승천까지 마리아의 일생을 다루지만, 그녀의 삶예수의 삶과 떨어질 수 없기에 예수의 행적이 오버랩된다. 그 내용을 묘사하는 바이올린의 노래는 17세기  음악이라고 보기엔 너무 혁신적이다. 특정한 표제를 두고 묘사하는 표제음악적 형식도 놀랍지만, 바이올린 1인 독백극 형식으로 구성을 짠 것도 굉장히 독창적이다. 바이올린이 올리는 독백 기도, 혹은 바이올린이라는 변사가 들려주는 성모의 무성영화. 이 소나타를 가장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은 바이올린 파트를 기도를 읊조리는 연극배우라 상상하며 듣는 것이다. 바이올린은 주로 나직이 노래하며 슬픔의 부분에서 주저하거나, 분노의 부분에서는 스타카토와 같은 아티큘레이션으로 감정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예수가 매 맞는 부분에서는 격렬한 트레몰로로 성모의 고통을 표현한다. 십자가를 매는 장면에서는 오르간의 저음에 얹혀 느리게 흐르는 바이올린이 예수의 무거운 발걸음을 묘사하고, 못 박힌 후의 긴박한 상황을 강렬하게 그려내는 속도감 있는 바이올린은 숨 막히는 몰입감을 들려준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성모승천 부분이다. 바이올린의 음색, 리듬, 터치 모두 고딕 성당의 높은 첨탑처럼 서서히 날아오르며 환희에 찬 밝은 선율을 노래한다. 그 상승하는 미세한 감정을 모두 전달하는 바이올린의 기민한 움직임, 치고, 때리고, 긁고, 흐르고, 노래하고, 잇고, 빠지는 모습은 단연 감동적이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기를란다요가 그린 <성모의 일생> 프레스코화가 있다. 사실적이고 우미한 표현, 입방체를 활용한 공간 깊이 표현, 연극적 제스처를 통한 스토리텔링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미감이 모두 발휘된 걸작이다. <성모의 일생> 중 '방문'을 보면 엘리사벳이 눈길을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고 마리아의 두 손을 잡는 장면을 포착해 실제로 연극이 이루어지는 듯한 리얼리티를 구현했다. 단순하고 자연스런 포즈를 통해 두 사람 간에 흐르는 애틋함과 반가움, 또 뱃속의 아기 예수에 대한 엘리사벳의 경애도 경건하게 그러졌다. <묵주 소나타> 중 2곡 엘리사벳의 방문 역시 느릿하고 여유있는 감성이 가득한 곡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표현하는데, 방문의 여정을 묘사하는 듯한 바이올린의 시퀀스가 마치 이야기를 읽어주는 듯이 들리는데 그 신박한 표현력에 감탄스러울 뿐이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방문> c. 1485-90, 프레스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비버의 비범한 묘사력도 놀랍지만 악보 뒤에 숨어있는 그런 감정들을 낱낱이 끄집어내 표현하는 연주자 레이첼 포저의 감수성 넘치는 연주도 굉장하다. 레이첼 포저는 줄리아노 카르미뇰라, 힐러리 한, 이자벨 파우스트, 파비오 비온디, 앤드류 맨츠, 율리아 피셔 등 뛰어난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연주자로 비발디 음반으로 각종 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갈채를 받았다. <묵주 소나타> 음반은 그녀의 뛰어난 연주에 힘입어 2015년 독일의 '쇼크 드 클라시카'에 선정되기도 했다.


비버의 <묵주 소나타>는 바이올린의 기도이며, 그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성모에게 바치는 애절한 기도이다.  기도의 주제와 바이올린의 노래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언어가 아니라 음악이 성모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 깊은 감정을 기교에 실어 성숙하게 표현해야 한다. 15번 성모 대관식을 마지막으로 묵주 기도 3꿰미가 모두 막을 내린다. 하지만 비버는 16번째 곡으로 파사칼리아 `가디언 앤젤`을 추신처럼 첨부했다. 이 곡은 바흐의 명곡 <샤콘느> 이전에 작곡된 최고 무반주 바이올린곡이다. 이 곡만 떼어내 독립적으로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비버가 '가디언 젤'이라는 곡을 덧붙인 이유가 뭘까? 성모를 호위하는 수호 천사의 의미일까? 비통하고 격렬한 악상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며 음반의 막을 내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H3jIX45bQDk

레이첼 포저가 연주하는 파사칼리아 '가디언 앤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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