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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69년생 07화

국민학교

by 김귀자

봄이 오는 소리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귀 기울이면 도처에서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꽃이 피고 새가 울면 봄이라고 말한다.

시골 길을 걸으면, 꽃이 피지 않아도 봄내음을 맡을 수 있다.

특히 한차례 비온 뒤, 굳은 땅을 걷고 있으면 풋풋히 느껴지는 봄봄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저녁 저편에서도 봄의 느낌이 코끝으로 전해진다.

아직은 연초록빛이 나지 않는 냉이국을 끓이나보다.

허기진 배로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소박하지만 바로 먹을 수 있는 밥상을 차려준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에서 차렸던 돌 접시에 뱀풀 반찬과 병뚜껑에 진흙밥이 그립다.


창꽃은 진달래다. 그땐 그렇게 불렀다. 창꽃은 초봄에 맛볼 수 있었다.

약간의 단맛과 함께 쌉사름한 맛이었다.

산에 가면 문둥병자가 간 빼먹다는 어른들의 말이 무서웠지만, 창꽃 따먹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우리집 앞산에 올라 창꽃을 보라색 입술이 되도록 따먹었다.

산에서 내려오면 손이 시린 시냇물에 손을 담그고 물을 먹었다.

봄이 오면 시금치와 찔렁을 꺽어 먹었다.

들판이나 논두렁 주위에 주로 나는 시금치는 새콤한 맛이었다.

이파리를 먹기도 했지만 주로 줄기를 먹는다.

시큼한 맛이 나서 시금치일까?.

그에 비해 찔렁은 줄기를 먹었는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아삭하고, 냄새 없는 오이 식감이다.

억지로 비유한다면 시금치가 사과 맛이고, 찔렁은 배 맛이다.

고양이 시금치도 먹었는데, 하트 모양의 작은 잎이 여러 개 뭉쳐 자란다. 맛은 새콤하다.


유월이면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

시골 산 기슭에 핀 꽃은 보기에도 예쁘고 향기도 좋다.

한 웅큼 따서 먹으면 달콤하고 향기로운 간식이었다.

높은 곳에 핀 꽃은 따기가 어려워서 더 예쁘고 맛있어 보였다.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따 먹어보니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추억의 맛이 느껴진다.


내가 어렸을 때는 껌이 귀한 시절이었다.

껌풀은 주로 논두렁에서 자라고, 우담바라처럼 작은 풀이다. 그 풀을 오래도록 씹으면 점성이 높아지면서

하얀 것이 껌처럼 된다. 맛은 녹색풀 특유의 맛으로 썩 내키는 맛은 아니었지만 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밀도 오래 씹으면 껌이 된다.


우리집에는 고야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면 하얀꽃이 피었다. 덜익은 연두색 고야는 새콤한 맛이고, 익은 것은 달콤했다.

난 익기 전에 쪼개면 쫙 갈라지는 고야를 더 좋아했었다. 지금은 그때 먹던 고야를 찾을 수 없다.

가끔은 새콤 달콤한 고야가 생각난다.


또 다른 슬픈 기억이 있다.

그날 나는 뒤란 굴뚝 옆에 머리를 무릎 위에 얹고, 몸을 최대한 작게 말아 숨기듯이 웅크려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주정은 밤늦도록 이어졌고, 그 소리 하나하나가 내 어린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장독대가 눈앞에 있었고, 그 뒤로 밤나무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무의 그림자가 장독대 위로 길게 드리워져, 더욱 어둑어둑해 보였다.

그때의 나는 너무 무서웠다.

어둠과 소리,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부모님의 다툼이 공포였다.

마치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그저 조용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원동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인 듯하다.

담임 선생님은 여자분이셨다. 어느 날 음악 시간이었는데, 친구들은 탬버린, 트라이앵글 같은 괜찮아 보이는 악기를 하나씩 받았다.

그런데 내 차례가 오자, 선생님은 솥뚜껑 모양의 큰 악기 두 개를 내밀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악기가 너무 창피했다.

무거워 보이고, 커다란 소리가 날 것만 같아서 연주하기가 부끄러웠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해보라고 권유하셨지만,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삐져서 음악 시간 내내 친구들이 연주하는 것만 바라봤다. 그때는 그냥 그게 싫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 악기는 심벌즈였고, 알고 보니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악기였다.

‘그때 선생님이 맡겨 주셨을 때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연주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지금 그 선생님이 다시 시킨다면,

‘아마도 아주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예뻤던 선생님은 할머니가 되셨겠지.'


학교에서 가끔씩 기생충 검사를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변을 담아가는 채변 봉투를 나눠주었는데, 선생님은 신선도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각자로 해오라고 하면 제때 수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우리 반 선생님은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 단체로 학교 밖 야외로 데려갔다.

그날 우리는 하나둘씩 사방에 흩어져 작은 봉지 안에 채변을 했다.

지금도 그 산 밑의 야외 화장실(?) 앞을 지날 때면, 친구들끼리 떠들며 함께 했던 추억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거리낌도 없이 천진했던 그 순간이, 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다.


이 기억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내 얼굴이 노랗고 기운이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거시가 있나 보다," 하며

약을 건네주셨다. 나는 별생각 없이 약을 삼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변을 보았을 때, 길고 하얀 지렁이 같은 것이 잔뜩 나왔다.

어린 마음에 그것은 너무도 징그러웠고, 온몸이 소름 돋았다.

‘내가 이런 것들을 뱃속에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때는 내가 밥을 자주, 또 많이 먹으면 엄마가 늘 농담처럼

"넌 뱃속에 거시가 들어있냐? 왜 그렇게 많이 먹냐?”

나는 그 말을 그냥 넘겼었는데, 그날 알게 되었다.

‘정말 내 뱃속에 거시가 있었네.’


한번은 하교 길에 큰 집 목화를 따먹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나의 목화 서리를 참지 못하고 막대기로 나를 많이 때리셨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는 옆집 아줌마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줌마가 나를 말리러 와서, 도망가라고 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고 계속 맞기만 했다.

결국, 나는 집을 나와 집이 내려다보이는 큰 밤나무 밑으로 갔다.

저녁이 되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점점 커졌고,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올까.’ 기대했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집의 불빛이 하나하나 꺼져가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때의 슬픔과 고독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시골의 밤은 깜깜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뒤란으로 통하는 윗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하도 울어서 코가 맹맹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아프고, 무섭다.


어렸을 적 친구라고는 옆집에 사는 춘화뿐이었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걔는 서울로 이사 갔다.

춘화와 나는 항상 붙어 다녔다.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젖먹이 강아지를 안고, 업어주며 엄마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강아지가 본능적으로 내 품을 파고들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춘화 엄마가 있을 때면 그 놀이는 하지 못했다.


내게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바로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쎄미다.

나도 성장하고 쎄미도 큰 개로 자라났다.

내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그 녀석은 충성스럽고 애정이 넘쳤다.

왜 쎄미라는 이름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가족 모두가 그 이름으로 부르며 사랑했다.

쎄미는 내가 외출할 때마다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강아지들을 낳을 때면 입으로 핣아 주고 잘 돌봤다.

하지만 강아지들이 눈을 뜨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이웃에 팔려가곤 했고, 나는 늘 걱정했다.

‘쎄미는 새끼들과 떨어지는 걸 슬퍼하지 않을까?'

쎄미는 가끔 산에서 토끼를 잡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식구들은 오랜만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

무를 썰어 함께 끓인 고깃국은 그 시절 내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쎄미는 항상 나를 먼저 반겨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 녀석과 함께한 몇 년 동안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쎄미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루 밑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반복하더니 점차 눈의 흰자위가 많아지며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 장면은 내 마음 깊이 새겨졌다.

그날 학교에 가는데 쎄미는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학교에서 내내 쎄미 생각을 많이 했다. 슬픔이 밀려왔다.

그때가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너네 집 개가 쥐약 먹고 죽었단다.”

그 말을 듣고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나를 반기던 쎄미는 없었다.

쎄미의 무덤이 없다는 것을 이미 학교에서 알았지만, 입 밖으로 묻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 쎄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들었다.

옆집 아줌마가 쥐를 잡기 위해 멸치에 쥐약을 묻혀 둔 것을 쎄미가 먹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옆집 아줌마를 미워했다.

어렸을 적, 동물들은 그저 식구 같았다.

아침마다 엄마는 우리 식구의 밥을 준비하셨고, 아버지는 사랑채 부엌에서 옥수수대와 볏짚으로 쇠죽을 끓이셨다. 소들이 먹을 여물이 완성되면 커다란 고무 함지에 담아 마굿간까지 퍼 날랐다,

쎄미까지 밥을 주고 나서야 우리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동물을 소중하게 대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젖도 안 뗀 송아지가 밭이랑을 만드느라 일을 하는 어미소를 따라 다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어미소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하면, 소를 몰던 아저씨가 어김없이 회초리로 때렸다.

어느 날은 고모네 개에게 물릴 뻔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개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도 어쩌다 유난히 짖는 개를 만나면 움찔한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동물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없고, 내 주변에 동물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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