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첫째 때도 보지 못한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6년 만에. 곧 마흔에 또 임신이라니, 현실 부정이 시작됐다. 그렇게 기다릴 때는 안 오더니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때는 어쩌면 이렇게 한 번에 찾아오는지. 마침 밤샘에 가까운 일정이 연속적으로 있을 때였는데, 무리해서인지 살짝 피가 비쳤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일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현실감이 없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손은 바쁘게 일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내가 정말 임신한 게 맞는지부터 어쩌다(?) 하게 된 건지, 낳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처음부터 새로 키워야 할 것인지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업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줄곧 기다리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임신은 너무 큰 변수였다. 그렇게 현실 부정을 오래 하다 보니 주변에도 최대한 늦게 알렸는데, 나중에 소식을 들은 회사 사람들은 "뭐라고? 곧이라고?"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 임신의 모든 증상
첫째 때는 입덧은 물론 가끔 환도통증을 제외하면 거의 증상이 없었다.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가 애 낳으러 갔던 게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때도 서른 넷이었으니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에 더해 5년이나 흘렀고 최근 노산의 기준이 서른 다섯인 점을 고려하면 이번엔 당연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히 이번에도 입덧은 없었지만, 입덧을 제외한 모든 증상은 다 닥쳤다. 팔에는 소양증이 생겨 한동안 자다가도 벅벅 긁었고, 손가락엔 관절염도 생겼다. 첫째 때 이미 잠깐 조짐을 보였던 환도통증은 이번엔 움직일 때마다 '악'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임신 관련 앱에서 '이번 주에는 이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알려주면 그 증상은 반드시 나타났다. 심지어 어디 가서 말하기 어려운 임신성 변비, 요실금, 치질, 빈뇨 등도 해당 주수가 되면 바로 생겨 일상을 괴롭게 했다. 임신 후기로 들어설수록 당연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떤 자세로 자도 잠이 들기 어려웠고 화장실도 자주 가야 해서 숙면은 커녕 쪽잠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깨어 있는 시간 머릿 속은 날로 번잡해졌다. 보통 다리가 많이 붓는다는데 나는 손이 그렇게 부어서 노트북 작업도 갈수록 힘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일할 때가 마음이 가장 편했다. 첫째를 제대로 안아주지도 놀아주지도 못한 시간은 점점 쌓여갔다. 처음에는 분명히 미안했는데 어느 새인가부터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져서 오로지 나만 생각하게 돼 마음이 불편했다.
# 노동의 가치
첫째 때와는 완전히 컨디션이 달랐지만 이번에도 일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날까지 임신하지 않은듯 똑같이 일하다가 때가 오면 아무렇지 않게 애를 낳으러 가는 게 나만의 원칙이었다. 누가 들으면 무슨 대체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는 거냐고 비웃겠지만 그게 내 버티는 힘의 원천이었다. 사실 이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기 만족일 뿐이다. 이런 마인드를 절대 누구에게 강요하거나 추천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스스로는 꼭 이걸 지키고 싶었다. 이 생각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종종 생각해봤는데, 아마 엄마가 옛날에 내게 "전날까지 일하다가 다음 날 너를 낳으러 갔다"고 한 게 무의식에 남은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엄마는 안양에서 서울시청까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그게 강요된 것이었겠지만, 이상하게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배경을 생각해보자면, 물론 책임감이나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싫은 마음 같은 것도 있겠지만 역시 나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이것도 병이겠지만,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루틴한 출입처의 업무이든 회사의 대관 업무이든 사실 대체 불가능한 업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 불안함 때문에 스스로 일에 얽매여 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괜한 잡생각만 들기 때문에 일을 떠안고, 그 일에서 파생되는 스트레스를 감내한다. 조금 이상하지만 내게는 그게 노동의 가치인 것 같다. 그렇게 때로는 맨바닥에 앉아서 때로는 종종걸음으로 다니면서 마지막 날까지 일을 했다. 종로에서 과천으로, 광화문에서 목동으로. 동선은 최악이었지만 움직이면 아기도 잘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움직였고 택시의 힘도 많이 빌렸다. 숨이 차기 시작했을 때는 휴직 중인 남편이 라이딩을 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 순산의 정석
첫째와 달리 둘째는 예상보다 일찍 나를 만나러 왔다. 새벽에 갑자기 찌를듯한 환도통증에 물이라도 마셔볼까 움직이다가 부엌 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진통이 왔는데 처음부터 5분 간격이었다. 바로 병원에 가야한다고 본능이 알려주었다. 한잠 든 남편과 첫째도 깨우고 친정에도 알린 뒤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궁문이 다 열린 상태였다. 졸다 나온 의사는 마침 내 담당 의사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한 달에 한 번 있는 당직이라고 했다. 그는 무통주사고 관장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바로 낳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했으면 차에서 애를 낳을 뻔 했다. 다행히 분만실의 조도는 첫째 때 수중분만할 때의 방과 비슷해 그 와중에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것도 잠시, '도와주세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침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순식간에 둘째를 만날 수 있었다. 첫째보다 500g이나 적었기 때문인지 모든 것이 수월했다. 태반도 바로 무사히 빠져나왔고, 트라우마로 남았던 회음부도 이번엔 꿰매는 중이든 이후에든 거의 아프지 않았다. 의사는 "이 정도면 베스트죠"라며 손꼽을만한 순산이라고 했다. 내 생각도 그랬다.
# '이만하면 되었다'
첫째 때는 없었던 훗배앓이가 꽤 있었던 점, 환도통증이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특이사항이 없었다. 모유는 여전히 양이 적었지만 첫째 때 한 번 대차게 스트레스를 받아봤기 때문인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모자동실은 필수 시간에만 했으며 좌욕과 마사지, 숙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황달 증상이 조금 있던 아기도 금방 나아 집에 갈 날을 세기 시작했다. '역시 둘째는 좀 쉬운가보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역시 살면서 어떤 경우에든 '이쯤하면 됐다'는 생각은 하면 안 된다.
아흐레 밤에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오한이 느껴졌다. 그렇게 10분 이상을 덜덜 떨고 나면 또 10분은 습식 사우나에 온 것처럼 땀이 나서 이불을 걷어찼다. 워낙 산모들은 체온조절이 안 된다고 들었기 때문에 조리하는 과정이겠거니 했다. 다음 날 혹시 몰라 진료를 봤지만 의사도 몸살인 것 같다고 해 타이레놀만 한두알 먹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새벽녘 다시 시작된 오한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정도의 것이었다. 마치 맨몸으로 이글루 앞에 서있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격하게 떨렸다. 열이 39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산후조리사는 혹시 젖몸살일 수도 있으니 아이스팩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으라고 해 더 야속했다. 의사에게 해열제와 항생제를 맞으며 누워 있는 동안에도 정신은 오락가락했는데 희한하게도 평소에 그리고 원하던 것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했던 느낌이 남아 있다. 이렇게 아파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저항은 감히 아니었고, 그럼에도 놓을 수 없으니 한 번만 봐달라는 탄원에 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링거에도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아기만 조리원에 놔둔채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쫓겨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가운데 맨다리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새벽 바람에 산후풍이 드는 건 아닌지 잠시 걱정했던 기억도 난다. 의료대란이 걱정됐지만 다행히 CT를 포함한 여러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도 열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아서 37도와 39도를 왔다갔다 했다. 한참 후에 나타난 의사는 정말 드문 경우지만 출산 후 난소 쪽에 혈전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추후에 조리원에서 듣기로는, 분만한 병원도 나름 30년 이상 된 곳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의사는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치료에 들어가는 게 안전하겠다면서 극단적인 약물 부작용들에 대해 설명했다. 어차피 조리원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입원을 결정했다.
# 3박4일, 다시 만나다
의사의 혈전 진단은 맞았고 혈액이 특정 균에 감염된 것도 파악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치료하면 되고, 심지어 수술 없이 주사와 약으로 가능하다는 데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산후조리도 되지 않은 몸으로 병상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링거가 꽂힌 오른손은 원래 붓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더 부어 관절이 굽혀지질 않았다. 초반 이틀 정도는 열도 잘 안 내렸다. 38도대에서 도통 떨어지지 않아서 이러다 조리원 퇴소일에 아기와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컸다. 모자동실 시간에 다들 엄마와 한방에 있을텐데 혼자 신생아실에 남겨져 있을 아기를 생각하면 눈물만 계속 났다. 병과 관련해서도 '노산이라 그런가', '오른쪽 난소에 혈전이 생겼다고 하는데 임신 기간 오른쪽으로만 누워 자서 그런가', '산후에 너무 빨리 복대를 한 게 문제였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병실에서 들리는 다른 환자들의 아파하는 소리와 기력 없는 소리도 우울감을 더했다.
그래도 버티니 시간은 갔다. 항생제가 잘 맞아 떨어졌는지 열도 쑥 내리기 시작했다. 수술한 환자도 아니고 열이 내리고 나니 억울하게도 겉보기에는 '나이롱 환자' 같은 느낌이었다. 의사는 이제 3개월간 약물 치료로 전환하자며 고맙게도 조리원 퇴소일과 내 퇴원일을 맞춰주었다. 퇴원 전날 밤에는 아기와 만났을 때 너무 펑펑 울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잠을 설쳤다. 짧지만 길었던 퇴원수속을 마치고 조리원에 달려가 나흘만에 다시 만난 아기는 역시 나보다 잘하고 있었다. 그새 쑥 자란 딸을 보면서 집에 가서 힘든 때가 와도 다시 만난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케바케'라고들 한다. 100명의 산모와 아이가 있으면 100가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정들만큼은 마냥 학습효과에 기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이번에도 완벽한 임신과 출산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는 완벽하게 내게 와주었다. 열 달 간 탯줄로 연결됐던 '원팀'이니까, 한 명만 완벽해도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