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노 쌤 Apr 29. 2023

비움과 채움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 숨을 내뱉듯 비움은 새로운 시작이다.

인생을 살면서 늘 같은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 졸업과 취업, 결혼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변화는 삶의 필연이다. 변화를 대하는 시작은 비움이다. 이제까지 쌓아 올린, 혹은 쌓인 많은 흔적이 아까울 수 있지만,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서는 오히려 '짐'이다. 버릴 때가 오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비우지 못하면 과거에 발목 잡혀 도태될 수 있다. 일상에 지쳤다면 더욱 '비움'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비워진 공간이 있어야 새로운 생각이 싹틀 수 있다. 


벚꽃과 튤립의 향연이었던 송해공원의 화려한 봄날은 끝났다. 하얗고 수수한 이팝나무꽃과 아카시아꽃이 가득 피었다. 이제는 화려한 꽃에 더 이상 마음이 설레지도 들뜨지도 않는다.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는다. 나무는 파릇파릇한 잎으로 성숙해지고 있다.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는 작은 열매가 조금씩 생장하고 있다. 시끄럽게 봄맞이를 준비하던 새들도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고 있다. 삶이나 자연은 늘 비움으로 성숙해진다. 

화려한 봄을 장식하던 튤립은 이제 화단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출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렀다. 월요일 교통이 많이 막히기도 했지만, 지난 금요일 산 중턱에서 잃어버린 마스크 끈을 한번 찾아볼 요량이었다. 

지난 4월 21일 금요일 퇴근 무렵, 산책 겸 사진을 찍으려 송해공원 뒷산에 올랐었다. 등산 중 숨이 차 올라 마스크 사이로 올라온 입김이 카메라 파인더를 흐리게 만드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끈이 달린 마스크를 벗어 버렸다. 마스크가 없다는 사실은 하산한 후에야 알아차렸다. 코로나 기간 내내 목에 걸려 있던 마스크 끈을 잃어버린 것이다. 

월요일임에도 평소보다 다소 일찍 송해공원에 도착했다. 데크를 따라 이동하다 금굴 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등산로를 오르다 청딱따구리를 찍었던 나무 근처 바닥에서 하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내 마스크임을 알았다. 엄청 반가웠다.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나뭇잎 사이에 떨어진 마스크를 들어 올렸다. 분명 내 마스크였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마스크 주위 그 어디에도 끈은 없었다. 몇 푼 되지 않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여 정든 마스크 끈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그날 하산하자마자 다시 산에 올랐다면 찾을 수 있었을까? 아쉬운 마음에 송홧가루로 노르스름해진 마스크를 주워 가지고 내려왔다. 엄격했던 방역에서 이제 나를 해방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숲 속에서 새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재미있는 작업이다.

2023년 4월 25일 화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흙길은 조금 미끄러웠다. 바람까지 불어 다소 추웠다. 저번 주에는 아침 산책임에도 땀까지 조금 났었는데, 봄날씨는 변덕쟁이다.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은 호수면을 경쟁하듯 낮고 빠르게 날고 있었다. 내 마음은 비에 젖으며 호수면으로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2023년 4월 26일 수요일

송해공원에 있는 세 개의 연못 중 유독 마지막 연못의 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며칠 사이 계속해서 물을 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펌프를 동원해 이미 낮아질 때로 낮아진 수위를 더 낮추고 있었다. 다른 두 개의 연못에는 이미 수련과 마름 잎이 수면 위를 덮기 시작했다. 연못 주변으로는 노랑꽃창포가 꽃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연못에 연을 심기 위해 작업자는 지속적으로 물을 비워야 했다.

2023년 4월 27일 목요일

산책로에서 먹이를 물고 있는 박새를 만났다.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듯 보였다. 자리를 비켜주자 박새는 데크 아래쪽으로 분주히 날아들었다. 그곳에 둥지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연못에는 비옷 장화를 입은 작업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을 심고 있었다. 작업자는 분주히 연뿌리를 진흙 속으로 찔러 넣었다. 작업은 빨리 끝났다. 하지만 진흙에서 작업은 그리 쉽지 않아 보였다. 작업자는 트럭 옆 화단 경계에 걸터앉아 담배를 내어 물고 작업으로 쌓인 피로를 내뿜고 있었다. 


2023년 4월 28일 금요일

송해공원에는 새소리도 잦아들었다. 환한 햇살은 산책하는 내내 내 마음을 따사롭게 비춰 주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옴개구리를 만났다. 녀석은 바닥에 배를 붙이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다가갈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봄볕은 개구리도 나른하게 만드는 것일까? 숲 속 나무는 겨우내 비워 두었던 숲을 여린 잎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침햇살로 하늘거리는 여린 잎이 찬란한 아침을 열고 있었다. 

숲은 겨울 내내 비워 두었던 공간을 눈이 부시도록 여린 잎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초에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에서 '텅 빈 공간' 즉 '카오스'가 처음 등장했다. 그리스인들은 아무런 형상도 질서도 없는 혼돈의 공간에서 '코스모스' 즉 질서가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상은 공간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그렇다.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공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손에 쥐고 싶다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만 한다. 자연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찬란했던 봄의 향연을 내려놓았다. 나는 산책으로 송해공원에 상념을 내려놓는다.

이전 08화 기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