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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Apr 23. 2023

기적

나무와의 만남은 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하는 순간이다.

송해공원에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높이 솟아 있다. 소나무는 처음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지 않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어린 시절은 조용한 산속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개발과정에서 벌목업자의 손을 타고 소나무는 옮겨졌을 것이다. 그렇게 한 곳에 모여진 소나무들 중 세 그루가 송해공원으로의 이식 대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 그루의 소나무조차도 각기 멀리 떨어진 산에서 살았기에 공원에서 서로 처음 만난 사이일지도 모를 일이다. 송해공원에서 소나무와 나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우연한 운명적 만남을 시작하였다. 138억 년 온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 일어난 찰나의 기적이다. 

송해공원에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 서 있다. 

2023년 4월 17일 월요일

교통 체증은 아침부터 나를 낙심하게 만들었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송해공원은 고즈넉하였다. 자연은 언제나 조급했던 나를 진정시킨다. 산책길을 따라 걷는 시간 동안 내 마음은 조금씩 비워지고 어지러운 상념에서 자유로워졌다. 숲에는 새들도 자기 짝을 다 찾았는지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둘만의 밀회를 위해 깊은 산속으로 날아갔을지 모르겠다. 조용한 아침이었다.


2023년 4월 18일 화요일

아침부터 비가 조금 날렸다. 송해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호수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봄 날씨는 정말 변덕쟁이다. 산책로에는 상수리나무꽃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산책로 데크에는 다람쥐가 내려와 서성이고 있었다. 조용하던 산에서 '빠~아', '삐~이"라는 소리가 마치 서로를 애타게 찾는 듯 들려왔다. 이 애틋한 소리는 강한 바람 소리를 뚫고, 호수 가운데 위치한 백세정까지 퍼졌다. 이 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숲은 많은 생물의 사생활을 감춰주고 있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강한 바람에 참나무 꽃들이 산책로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나무는 한 번에 엄청난 양의 꽃을 피운다.

 2023년 4월 19일 수요일

비교적 일찍 공원에 도착했다. 시간이 넉넉하여 등산로 쪽으로 산책 방향을 잡았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검둥이가 나타났다. 송해공원에는 작고 땅땅한 몸집의 검둥이가 산다. 작년에는 공원을 순찰하듯 검둥이가 돌아다녔는데,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다. 오랜만에 만난 검둥이는 심하게 으르렁 거렸다. 섭섭했다. 반기는 모습을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서운한 기분도 잠시, 검둥이 뒤쪽으로 작은 검둥이가 보였다. 새끼였다. 그동안 새끼를 낳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산책로에서는 반가운 제비나비 봄형이 길에 앉아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책로에는 상수리나무꽃이 무더기를 이루었고 팔각정 주변에서 공사 중이던 임도구조개량사업은 이미 마무리가 되었다. 지속적으로 옥연지 송해공원 둘레길을 관리하고 있기에 산림청도 걷기 좋은 명품 숲길로 선정했을 것이다.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드디어 거북이가 호수면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여러 마리가 있었다. 겨우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녀석들이다. 한낮에 기온이 올랐을 때만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침에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기온이 많이 오른 것이다. 생태계교란종이지만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인기척에 놀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거북이의 모습은 반가웠다.

 

옥연지는 인공 호수이다 보니 경계면으로 이어진 산비탈면은 급경사다. 표토층을 잃은 경계면에는 삶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는 나무가 많다. 쓰러진 나무, 혼자 힘으로 설 수 없어 쇠줄로 묶어 둔 나무, 기둥의 반이 물속에 잠긴 나무 등 힘겹게 삶을 지탱하고 있다. 산책로에는 몇 년째 뿌리를 내릴 터전을 잃고 속살을 내보이며 썩어가는 나무들도 있다. 강인한 나무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비탈면 소나무는 옆으로 누워 삶의 무게를 쇠줄에 의지하고 있었다.

2023년 4월 21일 금요일

송홧가루가 바람에 실려 날리고 있었다. 산중턱에는 노란 송홧가루 구름이 만들어졌다. 호숫가 경계에는 노란 띠가 생겼다.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꽃가루가 서로 모여 맨눈으로 보일만큼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송홧가루는 밑씨를 만나 수정한다. 수정으로 새로운 씨가 발생한다. 씨는 적절한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장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나무가 된다. 하지만 2조를 넘는 은하 중 우리 은하에서, 그 몇 천억 개의 별 중 오직 태양을 도는 지구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 존재한다는 것은 억겁의 시간을 되풀이해도 일어나지 않을 기적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다. 

소나무에서 만들어지는 꽃가루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이다.

버드나무 씨가 눈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흔하디 흔해 보이는 솜털 속에 숨어있는 깨알같이 작은 버드나무 씨앗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 오늘의 시간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희박한 우연한 확률을 거쳐 오늘과 똑같은 순간이 만들어질 순 없을 듯하다. 신도 늘 같은 값이 나오는 따분한 주사위 놀이는 하지 않을 것이므로...... 


순자는 "무릇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는 깊은 숲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다고 향기를 내뿜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무는 나무의 삶을 살고, 나는 그저 나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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