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바람처럼.

불안을 바라보는 시간.

by 재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특히,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옥 커피숍을 좋아한다. 처마 끝에 달린 작은 종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딸랑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맞춰 흐르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서울 은평구에 있는 한옥 커피숍을 자주 찾는 이유다.


그곳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으면 마음의 한편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공간에 스며든 고요함과 커피의 온기가 나를 감싸안는다. 이보다 완벽한 위로의 시간이 있을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고요함 속에서도 불안은 어김없이 스며들 때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특별한 일이 없어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조용히 웅크린 채 나를 옥죄는 감정. 커피의 온기로도, 잔잔한 선율로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그것.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날엔 신경정신과 약에 잠깐 의지하기도 한다.


세상에 내 불안을 알아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 혼자 끙끙 앓던 날들도 있었다. 문득문득 "도대체 왜 이렇게 불안할 까?"라는 생각에 빠질 때면 스스로를 한없이 몰아세우고, 괴롭힌다. 사실 찾아온 불안이 내 삶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무너질 일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늘 불편한 걸까?"


그 해답을 찾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인간의 생물학적 생태계에 대한 책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이별에 아파하고, 사랑에 벅차며,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감동하는 것. 그 모든 감정이 단순히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사랑에 빠질 대 분비되는 도파민, 상실을 느낄 때 치솟는 코르티솔, 그리고 위로받을 때 흐르는 옥시토신 까지.


모든 감정은 뇌 속의 화학물질이 만들 결과였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내 안의 감정을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감정들이 정말 나일까?"라는 질문이 마음 한 켠에 피어올랐다. 불안이라는 감정마저도 단순한 생물학적 반응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휘둘려야 하는 걸까? 이 단순한 깨달음이 내 마음에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주었다.


불안이 밀려올 때면 가만히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아, 지금 내 몸에서 코르티솔이 왕성하게 나오고 있구나." 그러면 그 불안의 크기가 조금은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내 감정이 나를 휘어잡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감정을 바라보는 쪽으로 자리를 바꾼 것처럼.


감정과 나 사이에는 부드러운 거리감이 생긴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내가, 이제는 한발 물러서서 그 흐름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전히 불안은 찾아오지만, 더 이상 나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조금만 기다리면 사라질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커피를 마시다 문득 밀려오는 고독과 불안감에 숨이 '턱'하고 막힐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마치 커피 위로 피어오르는 모락모락 김처럼, 뜨거울 땐 짙게 오르지만, 곧 사그라지는 것처럼. 감정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이상 불안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봄이 오려고 막바지 추위가 기승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처마의 종소리가 내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 같다. 불안도, 기쁨도, 슬픔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우리는 종종 완벽한 평온을 꿈꾸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기쁨에 들뜨지 않고, 슬픔에 잠식되지 않으며,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


불안은 벗어나는 게 아니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일.


삶은 완벽한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과 평온, 기쁨과 슬픔이 끊임없이 오가는 흔들림 속에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흔들림 자체가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감정이라는 파도를 억지로 잠재우기보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되 휩쓸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평온 아닐까?


커피가 식어간다. 머그컵을 감싸던 온기가 서서히 사그라들 듯, 마음속에 불안도 조금은 옅어지는 듯하다. 책장을 다시 넘기며 생각한다. "모든 건 결국 지나간다." 이 단순한 진실을 불안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내 불안도 나를 지키려는 본능일까?"


위험을 감지하기 위한 뇌의 오래된 습성. 그렇다면 불안을 완전히 없애야 할 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불안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호를 주니까.


혹시 지금 불안에 잠식된 채, 숨쉬기조차 버거운 순간을 겪고 있다면, 부디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 불안과 나 사이의 거리는 조절할 수 있다. 커피가 식듯, 바람이 잦아들듯, 감정도 결국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 위에 있는 존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괜찮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오늘은 그 불안을 그저 바라보며

글 쓰는 재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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