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꽤 똑바로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도,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하루를 망쳐놓았을지 모른다.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까지, 규칙과 법을 모두 지키며 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스스로에게는 관대해지고, 타인의 잘못 앞에서는 쉽게 확신에 찬 얼굴을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도 다르지 않다. 찬란한 업적 뒤에는 늘 말해지지 않는 그림자가 있다. 주관적으로는 떳떳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불쾌했고 상처였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그래서 겸손이 필요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무결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일 테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피하던 여자였다. 다섯 번의 결혼, 그리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던 여자.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이미 판단은 끝난 인물이다. 누구도 그녀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문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여자를 피하지 않는다.
정죄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물을 좀 달라.”
그는 그녀의 과거를 먼저 묻지 않는다. 잘못을 캐묻지도, 회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판단보다 먼저 건넨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태도였다.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범인이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르고,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장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관객은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낀다. 법적으로는 끝났을지 몰라도, 인간의 시간 속에서 그 죄는 정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말을 잃는다.
윤리학에는 이런 사고 실험도 있다. 고장이 난 기차가 달리고 있고, 당신 앞에는 두 개의 레버가 있다. 하나를 당기면 한 사람이 죽고, 다른 하나를 당기면 다섯 사람이 죽는다. 단, 한 사람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섯 사람은 당신과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말한다. 정의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 존재인지 드러내는 질문이라고.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선택 앞에서 인간은 늘 흔들린다.
요즘 매체는 연예인들의 잘못과 실수로 시끄럽다.
잘못, 반성, 사과, 용서. 이 단어들은 너무 빠르게 소비된다. 우리는 짧은 장면 하나로 누군가의 인생을 요약하고, 너무 쉽게 돌을 든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맥락 위에 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판단은 언제나 간단하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부터 돌을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돌을 들 자격은 과연 우리에게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정의이고, 어디서부터가 오만인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판단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적어도, 돌을 들기 전에 한 번쯤은 물어야 한다는 것.
당신은 지금, 누구를 향해 돌을 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정말 사마리아 여인 앞에 섰던 그 사람들과 다른가?
오늘도 글 쓰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