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밝고 건강히 키우는, 엄마의 가스라이팅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올초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엔 위 대사가 나온다. 자식도 되어보고, 부모도 되어본 입장에서 난 위 대사에 공감이 많이 됐다. 실제로 자식으로만 살았던 30년 동안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내게 못 해준 것만 되새기며 서운해했고, 부모로 살았던 5년 간은 자식들에게 더 해주지 못한 걸 미안해만 했으니 말이다.
작년 여름, 셋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감정은 기쁨보단 걱정과 불안이었다. 부부 합산 소득 월 600만 원 정도 되는 우리 집은 사실 아이 둘 키우기도 빠듯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셋째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나와 남편이 매일같이 초과근무를 하며 용을 써도, 앞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할 일만 가득하겠구나 싶었다.
"영유아기땐 예체능 몇 개만 시키면 돼. 미술이랑, 음악이랑, 체육 같은 거 말이야"
"이번 연휴 때 갈 데도 없어서, 가까운 데 짧게 다녀왔어"
아이 친구 엄마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 말들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걸렸다. 어떨 땐 작은 생선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하기도 했고, 어떨 땐 뭉툭한 돌에 맞은 것처럼 얼얼하기도 했다. 아이가 하나, 둘 있는 집에선 쉽게 하는 그 일들이 아이가 셋인 우리 집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린 뭘 해도 곱하기 3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 애들은 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계속해서 느끼며 살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 친한 친구에게 이런 내 고민을 털어놨다. 삼 남매의 장녀로 자란 친구는 엄마인 내 입장뿐만 아니라, 자녀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상담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네는 아버지 혼자 벌어 다섯 식구가 먹고사는 외벌이 가정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무척 알뜰하게 가계 운영을 하셨던 것 같다. 친구 말에 따르면 친구네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족 여행을 가더라도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텐트에서 숙박을 하고, 컵라면은 여행을 가야만 먹을 수 있던 귀한 음식이었다고 했다. "난 육개장 사발면이 그렇게 싼 걸 성인 되고 알았잖아?" 하며 황당해하는 친구의 얼굴엔 어린 시절의 그늘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말을 듣는 동안, 친구 부모님의 마음을 상상해 봤다. 아마 어머니도 나처럼 형편상 자식들에게 더 해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지 않으셨을까 싶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친구는 "아니, 우리 엄마는 항상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주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어"라고 했다.
친구는 자신이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어릴 땐 원룸에서 다섯 식구가 산 적도 있었는데, 그때 친구 어머니는 자신의 방을 갖고 싶다는 친구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원룸 구석에 커튼을 달아 독립된 친구의 방을 만들어줬다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친구 무리 중 유일하게 안정 애착유형인 이 친구의 건강한 자존감은 긍정적인 어머니덕에 만들어진 거라는 걸 말이다.
친구는 자신이 엄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거 같다고 했지만, 이런 가스라이팅이라면 나도 배워서 우리 집에 써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얼마나 현명한 가스라이팅인지, 친구의 얘기를 듣는 동안 친구 어머니의 지혜에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친구 어머니처럼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형편 내에서 아이들에게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앞으로는 '더 못 해줘서 미안해'가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 하는 마음을 갖고, 조금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세 아이의 양육에 임하기로 했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정을 잘 건사하고,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선 '미안해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했다. 다른 집과 비교하지 않고, 내 길을 가겠다는 그 굳건한 뚝심 말이다.
형편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마음 하나 고쳐 먹으니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어쩌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불편한 마음은 아이가 셋이라는 우리 집 형편이 아닌, 부족했던 내 마인드 때문이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