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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승 Sep 05. 2022

 오징어볶음,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아내에게 처음 하는 유구유언(有口有言)이자, 마지막 유구유언(悠久遺言)

신혼 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천 화수동에 있는 화수식당에 갔다. 나름 유명한 맛집으로 소개받았다. 메뉴를 보니, 정말 다양한 음식이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아내가 메뉴를 보고, 오징어볶음을 말했다. 그 메뉴 위에는 낙지볶음도 있었다. 난, 아내에게 낙지볶음은 어떠냐고 물었다. 대부분은 낙지가 오징어보다 맛이 부드러워 더 선호한다. 가격도 조금 더 비싸다.      


아내는 다시 오징어볶음을 말했다. 나도 다시 한번 ‘낙지볶음이 더 부드러우니, 그걸 먹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낙지처럼 부드럽게. 아내는 동의의 뜻을 표했다. 낙지볶음 2인분을 주문했다. 당시는 ‘반복된 내 제안’이 갖는, ‘아내의 동의’에 담긴 ‘하늘의 뜻’을 절대 알 수 없었다.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아내는 낙지볶음을 먹지 않았다. 물었다. ‘왜, 먹지 않느냐?’고. 아내의 답이다. ‘낙지를 못 먹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온 후에야 이 사실을 내게 알렸다. 추가로 다른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겠다고 한다. 나 혼자 실컷, 문자 그대로 ‘배 터지게’ 먹었다. 지금 배 나온 것도 그때의 여파다. 결국, 기분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했던 외식이었다.      


아내가 음식을 다양하게 먹지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징어볶음을 먹으면, 비슷한 종류에 속하는 낙지볶음도 당연히 먹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내 딴에는 더 좋고,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먹는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면, (좀 과장해서, 거기에 내 특기를 살려 보탠다면) 이 책의 상당한 분량을 채울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낙지볶음은 못 먹지만, 오징어볶음은 먹는다. 근데 ‘오징어 다리’는 못 먹는다. 본래 이런 의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더 말하면 배우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금은 별세하신 엄마,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생전에 아내에게 늘 하신 말씀이다. ‘넌, 어쩜 그렇게 한결같으냐’고.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물었다. “‘한결같다’라는 어머니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뭐냐?” 분명히, 정확히 답해주었다. ‘매우 만족해하신다. 당신에 대한 엄청난 칭찬이다.’라고.      


결혼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한결같다’. 헤어스타일과 옷을 비롯한 외모 가꾸기, (먹든, 만들든) 음식, (구매든, 배치든) 가전/가구, 자녀교육, 친인척 간의 예의, 친구와의 우정, 어른에 대한 예우 등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정말 ‘한결같다’.     


그런 ‘한결같은’ 배우자를 둔 사람으로서 행복하다. ‘한결같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낀다.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거 같다. 행복에 겨워 그러는 건가.      


난, (다른 글에서도 말했듯이) 어지간한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저들의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고 자평한다. 다행히도 나를 아는 주변 사람 대부분도 이 점에 대해서는 공통되게 인정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가리지 않는다. 잘 사귄다. 그런 나를 보고 찬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자랑질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혹, 다른 사람들과 갈등이 발생해도 웬만한 선에서 타협한다. 더 큰 불상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내게 잘못이 없고, 상대방에게 잘못한 것이 분명해도, 상대방을 궁지까지 몰지 않는다. 상대방이 스스로 적절한 제안을 할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삶에서 잘못한 부분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런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종교와 부모로부터 자연스레 배운 교육 그리고 ‘Tit-for-Tat’(팃포탯) 전략을 통한 배움일 수 있다. 어떤 면에선 相馳(상치)되는 거 같지만, 어는 부분에선 脈(맥)을 같이 하는 가르침이다. 여러 면에서 지금의 내 성향 또는 성품에 크게 영향을 준 건 틀림 없다. 다양함을 인정하면서도, 일치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다시, 화수식당 오징어볶음 이야기다. 나중에 물었다. ‘왜, 그때 낙지볶음을 먹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아내의 답이다. ‘한번, 오징어볶음을 말했으면 됐지, 또 뭘 말하냐! 혼자서 먹고, 고생 좀 하라!’는 의미였단다. 체험을 통한 생생한 가르침을 주고 싶었단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야 했다. 아내의 ‘한결같은’ 성품의 깊이를! 나 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결혼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도무지 그 경지를 따라갈 수 없다. 아내의 그 깊은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잘못을 지금 혹독하게 벌 받고 있다. ‘한번 말했으면, 그걸로 끝인’. 혹 실수든 고의든 아내의 말을 왜곡하여 인식하고, 나 스스로 착각/해석하여 행동한다면 그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의 책임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두렵고 떨린다.      


문제는 내가 한 말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아내가 해석한다는 거다. ‘한번 말했으면, 그걸로 끝인.’ 급변하는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탄력성이 뛰어난 성격(나르시시즘?)을 지닌 나의 말은, 그 뜻이 아닐 수도 있는데, 또는 상황에 맞게 얼마든지 잘 맞추는데.      


아내는 내게 묻지 않는다. (아내가 주장하는) ‘남편인 내가 말했다는, 그 말뜻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렇게 아내는 아내가 들었다는 내 말을 그대로 믿고/판단/확정한다. 결혼 초에 (내가 말했다)는 내용을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말하면서. ‘한결같은’ 아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렇게 말한 기억이 없다는 거다. 아내는 결혼 생활 하면서 ‘남편인 나’를 가장 가깝게 보고 경험했다. 아내는 나름 인정한다. 남편인 내가 어떠한 맥락에서 그 말을 하지 않았음을. 그런데도 ‘(남편도) 한번 말했으면 그걸로 끝인 거로, (아내) 자신의 처지에서는 한번 들었으면 그걸로 끝인’, 그런 ‘한결같은’ 아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의구심이 들만한 말을 했다면, 그 말뜻을 한번 묻고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은데---. 한번 들었으면 끝인 거다. 그런 ‘한결같은’ 아내다. 이런 내 해석과 이해가 엉터리로 결론이 나면 좋겠지만. 이것 또, 나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아내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아내는 타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향이다.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다. ‘난, 한번 아니면 끝이야!’     


여기서 ‘한번’이란, 글자 그대로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의 실수가 반복되었어도, 고쳐지지 않는 걸 의미한다. 단, 아내는 상대방에게 ‘실수하지 마라’는 언질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선 실수(?)하는 당사자는 ‘한번’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물론 아내도 실수하지 않는다. (내 판단/내 수준으로서는) 아내가 실수한 걸 여태껏 보질 못했다. 날 배우자로 선택한 결정적 실수를 제외하면. 근데, 고민은 여기에 있다. 아내 스스로가 자신이 진짜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아니면, ‘실수하면 절대 안 되는 완벽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아내도 사람이다. 사람이 어찌 실수하지 않고 살 수 있으랴?!     


아내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또다시 말하지만, 배우자로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함께 생활해 온 사람으로서 판단이다. 아내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 역시 매우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아내가 자신의 실수로 인해 타인에게 이른바 ‘손가락질’ 받는 걸, 난 보질 못했다.      


진실로 아내가 타인에 대해 실수하지 않고 살았는지, 또는 타인인 상대방이 ‘아내의 실수’를 ‘실수’로 인식하지 않았는지, 또는 타인인 상대방도 아내에게 아내의 실수에 대해 전혀 언질을 주지 않았었는지는 전혀 예상도 가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삼십여 년을 함께 한 남편으로서, 한 가지 아내에게 권유하고 싶은 게 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인제 그만 ‘神界(신계)’에서 내려오시라고. 신의 경지에서 내려오사, ‘人間界(인간계)’에서 생활하시라고. 다시 말한다. 지금은 인간계에서 지낼 때라고. ‘한결같은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아직은 ‘사람’일 뿐이라고. 인간이자 남편인 나는 ‘신을 아내로 둔 적이 없다고’. 내 아내는 ‘無誤謬(무오류)의 神(신)’이 아니라고.      


한결같지 않아도 좋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일부러 실수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혹여 실수 좀 하면 어떤가. 타인에게 실수했다면, 정식으로 인정과 사과를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이 요청되면 합당하게 보상하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살면, 정말 재밌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나와 함께 (국내, 세계, 우주)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고.      


덧붙여 말한다. 혹여 정말 당신이 신이라면, 신께서 인간에게 同化(동화, accommodation)하여 눈높이를 맞추어 준 거처럼, 인간인 내게 눈높이를 맞추어 달라고.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절대 신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높이를 맞추어 주기 위해, 직접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너무 나갔나. 그만큼 간절하다.)     


화수식당 사건 후, 난 아내에게 한동안 속죄의 의미를 담아, 최선을 다해 오징어볶음을 엄청나게 맛있게(?) 요리해 줬다. 아내는 ‘재영 아빠가 만든 오징어 볶음이 정말 맛있다’라고 말했다. 난, 아내가 ‘한번 말한 걸 끝끝내’ 믿었다. 이런 남편이, 아내에게 처음 하는 유구유언(有口有言)이자, 마지막 유구유언(悠久遺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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