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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Nov 14. 2023

유토피아는 없다.

매일매일이 평가인 생활이 시작된다.

"빛담 선배, 저는요, 여태껏 하위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 저는 늘, 언제나 하위였어요. 가자미 같은 인생"

"저는 그래서인가 이런 평가를 받아 너무 힘이 드네요."


동료의 시간을 절약해 주는 동료

 처음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하고, 동기들과 즐겁게 교육을 받고, 현장 프로젝트로 발령받아 마치 군대에서 '더블백'을 맨 이등병처럼, 첫인사는 단정해 보여야 한다며 정장을 입고, 업무용 노트북을 받고 "빛담"이라고 쓰여 있는 Seat Plan을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든 게 얼어있었고, 주눅 들어있던 때였다. 그저 주변 선배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필자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동료의 시간을 절약해 주는 동료'라는 나 스스로의 타이틀을 좋아한다. 회사생활 13년 차로 진입하면서, 이런저런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선물해주려 했지만, 저 말이 가장 내 맘에 들던 문장인 것 같다. 


 동료의 시간을 줄여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다. 마치 스타플레이어처럼 개인의 능력이 좋아 팀 전체의 납기를 줄여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감독의 역할처럼 적재적소의 이슈들을 잘 제어하고, 다른 동료들의 TimeLine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재작업 없이 전력을 다해 업무수행을 할 수 있게 도울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예전 신입사원이던 나처럼, 소위 '잡일'이라 불리는 일들을 수행하여 Core 근무자들의 시간을 벌어주는 일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필자는 업무 수행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잡일 담당이었다.


(방화벽) 뚫어뻥

 다행히 그 당시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처럼, 주야장천 복사기 앞에 서서 선배들 문서를 Copy해주는 업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입사한 2010년대에는, 이미 PaperLess Office가 구현이 어느 정도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복사잡무만 없었다. 커피주문받아 배달해 드리는 거, 맛집예약, 회식예약 등의 허드렛일은 아주 기본이었다. 가끔은 주말에 출근하여 검증시스템에서 올라오는 오류에 대해 옵저빙을 해야 하는 일들도 주어졌다. 좋게 생각해서, 주말에 돈 더 번다고 마음먹으면 꽤 기분이 좋기도 하였다. 주말에 공짜로 안 불러내는 게 어디냐 하고 말이다...

 

 그래도 그런 잡무들에 비해, 필자가 처음 맡았던 잡무들 중에는 '방화벽 담당' 일이 그나마 현업에 가까웠다. IT회사에서는 '방화벽'이 꽤 중요하다. 근데 사실 나도 다른 회사를 가본 적은 없어서,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현재까지도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방화벽 해제 작업이 꽤 중요한 일이다. 서버에서 서버사이 방화벽도 관리해야 되고, 개인 PC에서 서버사이 방화벽들도 관리를 해야 했는데, 선배들의 IP를 엑셀에 기입해 두고, 업무수행에 차질이 없게 방화벽 해제를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 번은 프로젝트 전체가 옆동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재수 없게 개인 PC의 IP대역이 달라져서 새로 할당을 받아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나는 프로젝트 인원들의 새 IP들을 발급받고 필요한 방화벽을 모두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Core 개발자 한 선배의 IP 끝자리를 잘못 복사하여 엉뚱한 IP로 방화벽을 해제하여 결국 그 선배만 이사 후 일을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요새는 개개인마다 각자 필요한 방화벽을 여는 게 일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막내'가 이 일을 모두 해내야 했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달리고 있어. 너만 달리는 게 아니야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반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본인 평가'의 시즌이 다가왔다.

"프로젝트 기여도" 

"핵심역량"

등등, 내가 자신 있어하지 못하던 내용들에 대해 기술을 하라고 입력창의 마우스 커서가 깜박깜박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주로 쓸 수 있던 건 방화벽이나 기타 잡무들을 한 내용밖에 쓸 수가 없었다. 

 화면개발업무를 받았지만 선배들이 하는 업무량에 비해 난이도는 매우 낮았고, 소스코드를 분석하고, 만들어 내는 속도가 같이 입사한 내 동기보다 확실히 낮았었다. 그런 많은 변수들 때문이었는지, 나는 나의 첫 고과를 '하위고과'로 받아 들게 되었다. 


 그 당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해 물었던 질문 중에는 "내가 정말 열심히 안 한 걸까?"라는 질문이었고, 그 답은 "아니요"였었다. 그렇다. 나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었다. 

 또 나에게 한번 더 물어봤다. "그럼, 다른 사람은 열심히 안 한 걸까?"라는 퀘스천에, 나의 자답은 "그것도 아니요"였다. 

 결국 회사 내에서의 '상대평가' 이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의 결과가 반영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밟아왔던 모든 경쟁의 코스는 모두 '상대평가'였다. 전교 1등도 상대평가요, 수능 석차도 상대평가다. 심지어 회사 면접도 상대평가인 것이었다. 어찌 보면 누군가는 맞아야 할 하위평가를 그냥 내가 받은 것이었다. 근데 왜 나냐고... 화는 났던 거 같다. 


 부서장으로부터 평가 통보를 받은 그날 하루정도는 멍하게 있었던 거 같다. '내가 하위 30프로 안에 들다니...'라는 아쉬움과 함께, 금전적으로 내년 연봉에 불이익이 간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그 충격도 하루 정도 지나자 무뎌졌다. 

 아울러 지금 퇴사를 하고 다른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한다는 것도 내 나이가 이미 스물아홉인데, 너무나도 어정쩡한 시기였고, 무엇보다, 필자의 학창 시절에 특정종목에 대해서 하위 30프로 안에 들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딱히 놀랍지도 않았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팀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위에 내가 언급했던 '동료의 시간을 절약해 주는 동료'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진정성 있게 보내기 위한 노력을 이어 갔다. 


게임의 룰은 바뀌었어(정량-> 정성)

 머리글에 잠깐 이야기했던 동료 후배분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를 한 사람이었다. '명문대'라는 타이틀을 내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이 하위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내게 건네자, 처음엔 '어떻게 계속 이기고만 살 수가 있었지?' 하면서도 나중에도 비슷한 경우의 사례로 내게 고민상담을 해오는 동기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필자가 회사생활을 잘 적응하고 있어 보여서 주변 동료들이 나에게 평가와 관련된 고민상담을 해온 것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그 후배는 몇 년 있다가 퇴사를 하고 말았다.)


 사실 필자는 학창 시절 및 대학생 때의 시험등의 '정량평가' 보다 점수로 측정할 수 없는 '정성평가'가 나에게 있어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발능력, 외국어, 업무능력 모두 평균이거나 이하인 것들이 많지만, 소통이나 협업, 추진력등 다른 부분에 있어 필자가 다른 동료들 대비 우위로 평가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의 평가는 정량평가로만 등급이 나뉘는 것이 아닌, 정성평가에 의한 '양념' 요소가 훨씬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회사에 처음입사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올바른 꾸준함"이다. 이 말을 계속 머릿속에 되뇌며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라 맨날 그렇게 될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꾸준히 올바른 하루를 직장에서 보내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 덕분일까? 운이 좋게도 필자는 회사 입사 후 첫 평가에서 하위평가를 받은 이후엔 나머지 평가에서 크게 밀려본 적이 없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동료와 팀을 위해 본인이 어떤 일이든 기여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개발자이든 관리자이든 아니든 간에 어딜 가도 '인정' 받고 직장생활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물론, 개발자라면 본업인 개발을 너무 못해서도 안된다. Function 구현능력과 더불어, 각종 문제해결능력을 지니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자기 계발은 필수이다. 하지만 본인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슈퍼개발자 선후배가 있는데, 스스로 그만큼 못한다고 생각하여 자책할 필요도 전혀 없다. 본인의 강점을 파악하여 그것을 조직과 팀에 녹여 기여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생활은 너무나도 길다. 학창 시절처럼 시험 본다고 밤새지 않아도 된다. 대신 의미 있는 하루하루가 쌓여, 그것이 본인의 평판이 되고, 브랜드가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더 많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동료들이 너무나도 잘한다고 괴로워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그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지면 그걸로 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분명 앞으로의 삶은 점점 더 많은 기회들로 채워져 나갈 것임을 필자는 확신하며, 나 또한 그런 날들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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