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설치 기사와 IT 서비스업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번 주, 가슴 졸였던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물론 군인가족이나 자주 이사를 다니는 분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내겐 태어나 두 번째, 그리고 9년 만의 이사였다. 이사 당일 짐을 옮기고 잔금을 치르는 것부터, 입주 청소업체를 부르지 못해 창틀과 부엌 물때, 집안 곳곳의 묵은 때를 직접 닦아내야 했으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마무리되고 나니 조금씩 새 환경에 적응해 나갈수 있었다. 다만, 현재 이사만 진행이 된 것이지, 에어컨과 식기세척기를 비롯한 가전 설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내는 주말까지 포함해 오전 단기근무를 나가니, 주요 가전 설치 기사님들을 맞이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그날은 에어컨, 인덕션, 식기세척기, 빔프로젝터, 로봇청소기까지 다양한 설치가 예정되어 있었고, 기사님들이 도착하자마자 거실은 순식간에 제품 박스와 선들로 뒤엉켜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특히 습도가 높아 숨이 막히는 날씨 속에서, 에어컨 기사님들은 외벽에 매달려 위험한 작업을 묵묵히 해냈다.
그들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고, 아마 다음 고객의 독촉 전화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내 앞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설치 작업을 끝낸 뒤 빠르게 제품 사용법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평점 10점 부탁드립니다”라며 인사하고 돌아갔다. 에어컨 팀뿐 아니라 모든 기사님들이 같은 멘트를 남겼다.
짐작 컨데, 그들에게 고객의 평가는 단순한 피드백이 아니라, 생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나는 같은 직장인으로서 그들의 보상체계가 궁금해졌다. 아마 기본급에 건당 인센티브가 붙는 구조일 테고, 그렇다면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을 터. 택시기사나 자영업자처럼 끊임없이 일을 이어가야 원하는 소득에 닿을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아마도, 고객의 평가 점수가 다음 일감 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설치가 끝나고 나서야 오후 여섯 시. 대낮의 무거운 습기는 가라앉고, 가을이 고개를 내미는 여름 저녁이 찾아왔다. 산책을 하며 오전에 가전을 설치하려 와 주신 기사님들을 떠올렸다. 땀에 절은 작업복,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평점 10점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이 걷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IT서비스업체다.
플랫폼 기업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요청을 받아 대신 처리하는 점에서 나 역시 서비스업 종사자다. 그래서 남들에게 “개발자”라고 하기보다 “서비스업에 종사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체 솔루션을 만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국 고객의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개발자답지 않은 일도 마다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설치 기사님들처럼 친절과 전문성을 갖추어 대응해야 한다.
다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다.
내가 연차를 쓰더라도 월급이 줄어들지 않고, 평가 또한 반년·1년 단위의 ‘평판 평가’로 진행되니,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 반면 앞서 만난 설치 기사 분들은 단 한 번의 작업, 단 한 번의 고객 평가가 다음 생계를 좌우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한다. 그런 환경에서 일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무게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이제 이사로 인한 개인 업무를 마무라 한 뒤 첫 출근길,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도 오늘은 그 날의 설치기사님들처럼, 나의 서비스를 고객에게 잘 전달해보자.”라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회사에 도착해 메일함을 열자, 애매한 요청과 무리한 요구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들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들을 맡았을 때에도, 그 힘듦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버텨내려면 감정근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는 왜 이곳,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당위성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정도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도, 쏟아지는 업무를 감당하면서 감사함을 유지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자꾸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
비록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적성에 꼭 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크게 싫은 부분이 없는 것도 분명 행운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그게 바로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곱씹어보니 정말 그렇다. 나 역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감사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일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묵묵히 버텨내는 것. 그것이 곧 적성이고, 또 감사의 이유가 된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