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고, 이어지고, 사랑하고
나른한 햇살이 거실을 벌꿀빛으로 물들이던 주말 오후였습니다.
모든 풍경은 고요한 수채화처럼 서로를 물들이며 조금씩 번지고 있었지요.
이윽고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속
네모의 세상이 기울어지더니,
색깔들을 가득 머금은 꿈의 조각들이
'와르르' 하는 탄성과 함께
별들의 강처럼 쏟아졌습니다.
이윽고, 딸깍. 딸깍.
정적을 깨우는 소리가,
시계의 초침처럼 리듬감 있는 울림이 되어
거실을 가득 채웁니다.
그것은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조용하고도 견고한 약속의 언어였지요.
금빛 햇살이 수채화처럼 번져가던 오후.
세계는 그렇게 단단한 소리를 내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빨강은 뜨거운 심장이었습니다.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열정 가득한 벽돌 심장.
파랑은 창문을 내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먼바다의 푸른 꿈이 드나들도록.
노랑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흩뿌려졌습니다.
이야기 곳곳을 밝히는 아이들의 웃음처럼.
초록은 길이 되고 숲이 되었습니다.
나아갈 용기와 돌아와서 쉴 자리를 함께 건네주며.
하양은 쉼표였습니다.
빽빽한 문장들 속에 숨 고를 틈을 내어주는.
검정은 밤이었습니다.
그 모든 색깔의 꿈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깊고 다정한 밤.
색깔들의 언어로 작지만 위대한 세계를 짓는,
네 아이들.
실은 가장 다정하게 삶의 깊은 지혜를 일깨워주는
나의 작은 선생님들입니다.
첫째는 설계자입니다.
파란 블록을 세우며, 아이는 선언합니다.
"이건 바다를 보는 창문이야."
그 손끝에서 파랑은,
닿지 못한 먼바다의 숨결을 실어 나르는 통로이자,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문이었습니다.
딸깍, 딸깍—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이 되어 공간을 채웁니다.
나는 문득 깨닫습니다.
저 반복되는 소리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저 건실한 반복이 마침내 견고한 집을
세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이는 지금,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질서를
쌓아 올리는 중이었습니다.
아이의 손끝에서 울리던 '딸깍' 소리는,
어느새 마음속으로 들어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의 반복되는 하루도
이렇게 매일 쌓아 올린다면,
언젠가 견고한 삶의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마치 대답처럼,
아이가 만든 벽은 점점 더 단단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벽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함께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탐험가입니다.
대장이 만든 질서의 지도를 잠시 들여다볼 뿐,
아이는 이내 자신만의 좌표를 찾아
용감한 항해를 떠납니다.
노란 블록들이 둘째의 웃음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별비가 온다!"
그 장난기 어린 얼굴 위로,
가장 눈부신 빛이 쏟아집니다.
첫째가 질서의 세계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면,
둘째는 다정함의 세계를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저 흩날리는 노란 색깔들은
웃음으로 세상을 감싸 안는,
눈부신 어긋남이었습니다.
견고한 벽 사이에 피어난 작은 들꽃처럼,
든든한 집 위에 내리는 따스한 햇살처럼,
아이의 노란 블록들은
작은 세상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탐험가는 온몸으로 말해주었지요.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 같은 별들이,
실은 서로의 어긋남을 배경 삼아
밤하늘 전체를 아름답게 밝히고 있는 거라고.
셋째는 여백의 이야기꾼입니다.
모든 빈 공간에 이름과 사연을 불어넣지요.
셋째의 세계는 채워진 곳이 아니라,
비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빨간 블록을 쌓아 올립니다.
그것은 작은 마음의 두근거림을 닮은
'심장 벽돌'이었습니다.
빨간 블록으로 세계의 심장을 쌓아 올리면서도,
아이는 가장 중요한 자리를 비워둡니다.
빠진 조각, 텅 빈 공간.
아이는 그곳에 '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여기로 누군가 들어올 거야.'
그 순간, 빠져 있던 조각의 이름은
'기다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완성이란 모든 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비워두는 여백이며,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마음의 집이라는 것을요.
넷째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세 살 막내의 세계에는
설계도도, 철학도 없습니다.
오직 즐거움이라는
단 하나의 법칙만이 존재합니다.
아이는 초록 블록을 한 움큼 쥐고는,
마치 마법처럼 외칩니다.
"풀!"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의 발치에서 초록의 길이 자라나고
작은 숲이 우거졌습니다.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너그러운 그늘까지도요.
나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첫째의 질서도, 둘째의 다정함도,
셋째의 기다림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외침이자 가장 강력한 조각의 접착제는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요.
막내는 그렇게 가르쳐줍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힘은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이며,
즐거움이야말로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의 세상으로 만드는
가장 위대한 힘이라는 것을.
딸깍, 딸깍.
한 조각이 다른 조각에게 걸어가는 구두 소리.
흩어진 이들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발소리.
딸깍, 딸깍.
처음엔 시계의 초침 같았던 이 소리는,
이제 화려한 무도회의 왈츠가 되어
거실을 가득 채웁니다.
저는 이 찬란한 여정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질서로 균형을 잡는 법과
용감한 어긋남으로 새 길을 내는 법,
따뜻한 여백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저 색깔들이 서로를 꼭 안아줄 수 이유,
즐거움을요.
깊은 저녁, 어느덧 거실은
다정한 달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달빛은 아이들의 숨결과 웃음소리,
오늘 깨달은 삶의 지혜를 소중히
꼭 끌어안고 있었지요.
문득, 그 빛에 이끌려 제 안을 들여다봅니다.
저에게도 레고 장난감처럼,
비어 있는 홈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 어쩌면 그것은 상처나 결핍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소중한 누군가가,
혹은 더 나은 내가,
언젠가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릴
그날을 위해 보내온,
가장 다정한 초대장일지도 모릅니다.
노란 별비가 창밖 하늘로 돌아가고,
아이들의 작은 세계는
그 빛나는 밤하늘 아래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네 명의 선생님들은
이제 꿈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짓고 있겠지요.
거실에는 내일의 대답을 기다리는
미완성의 조각들만이,
밤의 정적 속에서 희미한 빛을 냅니다.
그중 마지막 남은 조각 하나가,
이렇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아직 빈 공간으로 남겨 둔,
마음 안의 초대장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