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항상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
토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빽빽하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비친 햇살이,
청설모 스키의 반질거리는 털 위에서
만족스럽게 흩어졌습니다.
"아주 훌륭한 선택입니다!
두 분의 현명함이 아이들의 미래를 밝혀줄 거예요."
부부는 계약서의 지정된 곳에 나뭇잎 도장을 찍고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습니다.
도토리 구천 개의 무게가 현실로 다가왔지만,
그 무게는 곧 다가올 행복의 값이라 믿고 싶었지요.
하린이와 리안이는 그저 새집이 생긴다는 사실에
신이 나 방방 뛰어다녔습니다.
이삿날, 리나는 작은 짐까지 꼼꼼히 챙기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습니다.
"이리 줘. 무거운 건 내가 들게."
토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나의 짐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그러게 '참새 이삿짐센터'로 하자니까.
맡기기만 하면 순식간에 옮겨준다는데."
"아이참, 거기 또 도토리가 얼만데.
이제 단 한 알이라도 아껴야지."
리나의 단호한 손사래에 토리는
더 고집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굴참나무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에는,
새로운 희망의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이사를 마친 후,
새로운 집으로 들어선 가족들의 얼굴은
마냥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나 집 안을 빙글빙글 뛰어다녔고,
부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주 잡은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방,
높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는 숲의 근사한 전경.
거리를 오가는 세련된 청설모 이웃들.
어느덧 토리네 가족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된 듯했지요.
집 근처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는
마음마저 맑아지게 해주었습니다.
하린이와 리안이는 더 이상 위험한 멧돼지 길을 걱정하지 않고,
'안전한' 숲 속 유치원 길을 즐겁게 뛰어갔습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나면,
토리와 리나는 밖으로 나가
열심히 도토리를 모았습니다.
"리나, 저기 큰 게 있네!"
"당신도 조심해. 허리 다치겠어."
몸은 고단했지만,
서로가 곁에 있었기에 마음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모은 도토리의 개수는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네 식구가 배불리 먹고도 창고에 저축을 할 수 있었고,
'이자'라는 이름의 도토리도
매달 꼬박꼬박 은행에 가져다주었습니다.
토리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하늘나무' 집안 가득 쾌활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날이 밝아오고,
평소처럼 도토리를 모으러 집을 나선
아침이었습니다.
"저기 봐, 토리.
또 새 이웃이 이사 왔나 봐."
리나가 가리킨 곳에는,
며칠 전의 그들처럼 분주히 짐을 나르는
또 다른 다람쥐 가족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나무 마을'은 나날이 번성했습니다.
스키의 부지런한 '홍보' 덕분인지,
낯선 다람쥐 이웃들이 매일같이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토리와 리나처럼 도토리를 모으러 다녔습니다.
숲은 눈에 띄게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큼직한 도토리 하나를 두고 다람쥐들끼리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숲의 너그럽던 인심이 삭막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저녁 아래층의 멋쟁이 청설모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집을 두드렸습니다.
"아유,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앞으로 조심시키겠습니다."
부부는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습니다.
청설모는 못마땅한 듯 모자를 고쳐 쓰고는
휑하니 돌아서 버렸습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예전 집에서는 마음껏 뛰어놀아도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엄마, 흙냄새 나던 옛날 집이 보고 싶어요."
다람쥐 부부는 이제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다른 다람쥐들이
그날의 도토리를 몽땅 가져가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유치원에서는 '맞벌이 부부'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맡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해가 질 때까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필사적으로 도토리를 주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녁 즈음에는
둘 다 녹초가 되었습니다.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다정하게
물어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가족 간의 대화가 사라졌습니다.
리나는 문득,
이 낯선 고요함이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피곤에 젖은 무거운 눈꺼풀은
더 깊은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렇게 열심히 버티다 보면...
언젠간 이 도토리도 다 갚고 여유가 생기겠지.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다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여행도 가고, 하린이랑 리안이랑 실컷 놀아줘야지.
이렇게 열심히... 언젠가...'
리나의 다짐은 언제나 고단한 잠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치열한 도토리 경쟁에,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금슬 좋던 부부는 이제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르는 것조차 지쳐버린 듯했습니다.
그들의 말속에는 깊은 체념만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조용히 발소리를 숨겨야 했습니다.
마침내, 은행에 도토리를 내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창고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부부는 처음 계약했던 스키를 찾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번 달 낼 도토리가 조금 부족한데...
혹시 다음 달에 같이 내면 안 될까요?"
늘 인심 좋게 웃어주던 스키라면,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부부의 예상과 달리,
스키는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더니,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빌린다'라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라는 것을,
둘은 사무실에서 쫓겨나듯 나오며 깨달았습니다.
어느 해 질 녘, 빈손으로 도토리를 찾아
평소보다 더 멀리 헤매던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예전에 살았던
그 땅속 구멍 집 근처에 멈춰 섰습니다.
리나는 그 초라하고
낡은 그루터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토리가 다가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의 눈시울도 붉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복했던 모든 것이,
바로 저 낡은 그루터기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음 편 '태풍과 의문의 가시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