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청설모
어느 숲 가장자리,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겉보기엔 평범하고 낡아 보였지만,
그곳은 토리와 리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였지요.
그루터기 바로 아래,
포근한 이끼로 단장된 땅속 구멍 집에는
하린과 리안,
두 아이가 재잘거리고 있었으니까요.
네 식구로 이루어진,
부족함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숲 속 유치원에 재잘거리며 달려가고 나면,
토리와 리나는 오랜 연인처럼 나란히
숲 속을 거닐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먹을 도토리를 딱 그만큼만 줍고,
나머지는 다른 이웃들을 위해 남겨두는 여유도
잊지 않았습니다.
숲은 언제나 너그러웠으니까요.
그들은 숲의 모든 곳을 마음껏 뛰어다녔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일러주는 것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지요.
"저기, 멧돼지 아저씨들이
진흙 목욕을 하는 길로는 가면 안 돼.
뱀이 겨울잠을 자는 굴 근처도 위험하단다.
그리고..."
토리는 언제나 숲 반대편,
정체 모를 뾰족한 가시들이 가득한 곳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곤 했습니다.
"저 '밤의 숲'에는 절대로 가선 안 된다.
아빠가 아주 젊었을 때, 호기심에 저 너머로 갔다가
가시돌에 찔려 꼬리를 잃을 뻔했거든."
그 아찔했던 기억은 토리에게
'안전한 울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다람쥐 가족을 힘들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끔 사나운 족제비가 나타나도,
재빠르게 안전한 굴 속으로 몸을 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잔잔한 행복이 강물처럼 흐르던 어느 날,
낯선 청설모 한 마리가
그들의 그루터기를 찾아왔습니다.
매끄러운 잿빛 털에,
값비싸 보이는 조끼를 걸친,
꽤나 세련되어 보이는 청설모였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사랑스럽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계시다니, 정말 보기 좋군요."
청설모, '스키'는 부부가 기분 좋을 말들을
한참이나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집안을
마치 감정사처럼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슬픈 표정을 짓더니,
깊은 연민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그루터기는 오래되어
나쁜 곰팡이 포자가 날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 호흡기에 치명적일 수 있단 말이지요.
게다가 땅속 집이라니...
요즘 같은 장마철에 비라도 쏟아지면,
하룻밤 만에 물에 잠길 수도 있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토리와 리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걱정'이라는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스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층 더 부드럽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숲 가운데에 '하늘나무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높고 커다란 나무 집들이 있지요.
그곳에서라면, 두 분의 귀한 아이들을 안전하고
'격식 있게' 키우실 수 있을 겁니다."
다람쥐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스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들을 숲 가운데로 안내했습니다.
'하늘나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정말이지 장엄한 풍경이었습니다.
떡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하늘을 찌를 듯 굵고 튼튼한 참나무들이
거대한 도시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토리와 리나는 고개를 들어
그 끝없는 높이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스키는 다시 한번,
준비된 대사를 읊기 시작했습니다.
"이 숲 속 아파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사계절 내내 도토리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은 물론,
햇살이 집 안 깊숙이 들어오는 남향에,
명문 숲 속 유치원도 아주 가깝습니다.
숲 중앙에 위치해 어디로든 가기 편리한,
이른바 완벽한 '숲세권'이지요.
시냇물도 바로 옆에 흐른답니다."
아빠 다람쥐 토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나무의 저 탄탄한 위용.
가지마다 매달린 풍성한 도토리.
그리고... 그곳을 오가는 다른 청설모들.
모두가 '스키'처럼 털에 윤기가 흘렀고,
근사한 조끼나 리본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지요.
그때, 스키가 연극의 클라이맥스처럼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원래 이 하늘 나무집들은 도토리 1만 개를 주셔야만
입주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는 분들께는
저희가 특별히 할인을 적용해 드리지요.
바로, 도토리 9천 개로 해드릴게요."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저희 아이들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에겐 그렇게 많은 도토리가 없는걸요."
"그런 건 아무 걱정 마십시오."
스키가 상냥하게 웃었습니다.
"저희 '숲속중앙은행'에서 기꺼이 빌려드립니다."
"그, 그렇게나 많이요?"
"그럼요. 그리고 30년 동안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일 년에 300개씩 말이지요.
대신, 저희의 호의에 대한 '이자'를
함께 보내주셔야 합니다."
"이자요...? 그게 뭔가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빌려드리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나 할까요?
일 년이 365일이니,
원래 갚으시기로 한 300개를 제외하고
65개만 더 이자로 주시면 되지요.
즉, 매달 정해진 날에 도토리 30개씩만
저희 은행 창구로 가져다주시면 되고,
매년 마지막 날에만 35개를 주시면 됩니당.
어때요, 현명한 부모님이시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다람쥐 가족은 낡은 그루터기 아래,
땅속 구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들의 아늑했던 보금자리는
어쩐지 춥고 눅눅하게 느껴졌습니다.
둘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셔서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내일 이곳에서 다시 뵙지요.'
스키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오늘 낮에 보았던 눈부신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맑은 햇살, 하늘까지 닿을 듯한 멋진 나무집.
그곳을 당당하게 오가던 빛나는 털의 청설모들.
리나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깼습니다.
"토리... 스키 씨 말이 맞는 것 같아.
만약 정말 비가 많이 오면... 여기가..
하린이와 리안이는..."
토리도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집으로 이사 가면...
우리 아이들도 저들처럼 빛나는 털을
갖게 되지 않을까?"
부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숲에 널린 것이 도토리니,
둘이 조금 더 부지런히 주워 모으면...
하지만 동시에,
토리는 할아버지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도토리 9천 개'라는 숫자의 무게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그날 밤은 참으로 길었지요.
드디어 다음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두 사람은 하린이와 리안이의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편 '인생은 항상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