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그리고 가시돌의 정체
참새들이 다급하게 하늘을 오가며
숲 전체에 경보를 울렸습니다.
한창 황금빛 들판이 무르익고,
숲의 열매들이 가장 탐스럽게 가지를 휘게 만들던
그 순간에 닥친 재앙 예고였습니다.
특히 그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은
토리와 리나였습니다.
"여보, 태풍이래! 이제 우리 어떡하지?
이번 달 내야 할 도토리는..."
며칠 뒤,
참새들의 경고는 잔인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숲이 기억하는 그 어떤 폭풍보다도
거대하고 사나운 태풍이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거센 비바람에 세상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렸고,
숲 속 곳곳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관리사무소의 다급한 방송이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다람쥐 가족도 강한 비바람에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토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 며칠째 도토리를 모으지 못했는데 어떡하지?
이 밀린 양을 채우려면,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군.'
하린이와 리안이는, 아빠의 한숨 소리가
지금 창밖을 때리는 비바람 소리만큼이나
무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 모든 소리가 어서 그치기만을 바랄 뿐이었지요.
긴 밤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아침이 왔습니다.
'짹짹' 정겨운 새소리에 눈을 뜬 토리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바다처럼 짙푸른 하늘과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싱그러운 흙냄새.
토리가 잠시 그 해방감에 취해 땅을 밟아보던 그 순간,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리나를 깨워 어서 도토리를 모으러 가야겠어."
그는 허둥지둥 다시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비록 태풍은 지나갔지만,
숲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특히 작은 나무들이 많던 숲 반대편은 처참하게 무너져,
많은 동물이 보금자리를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토리는 불쌍한 마음에 잠시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며칠간의 공백을 메우려면
오늘부터 이전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리나는 도토리를 모으기는커녕,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토리가 투덜거렸지만,
아내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귀한 지혜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요.
예전에 살던 집은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땅속 구멍에는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고,
지붕이 되어주었던 낡은 그루터기는
폭풍에 산산조각 나 있었습니다.
"아... 어쩌면...
이사 오길 잘한 건지도..."
토리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리나는 그 폐허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별안간 환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토리, 우리 다람쥐들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그 속담 알아?"
"살면서 유독 쓰고 떫은 도토리를 줍게 된다면,
그걸로 도토리묵을 만들어
맛있는 양념 가득 얹어 먹으면 된다."
"그런 속담이 있었어?
난 처음 들어보는데..."
토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자,
리나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토리는 아내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얼굴에 아주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서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토리도 모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왠지 나도 좀 더 힘이 나는군.'
문득,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는
단 한 번도 아내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토리는 리나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습니다.
리나는 깜짝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자신을 안은 토리의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아주었습니다.
"저... 저희가 길을 잃었어요.
이 근처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애처로운 목소리에 돌아보자,
흙투성이가 된 작은 아기 토끼가
겁에 질린 눈으로 서 있었습니다.
곧이어 그 뒤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토끼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토끼 가족이구나.
어디에서 오는 길이니?"
"저희는... 숲 반대편에서 왔어요."
아기 토끼가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숲 반대편.' 그 한마디에,
리나는 그들이 겪었을 끔찍한 밤을 직감했습니다.
"여보, 저분들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이라도 대접하자."
"지금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그래도 저 가엾은 아이들 좀 봐봐.
하루만이라도 우리 집에 머무르게 하자."
토리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덜덜 떨고 있는 아기 토끼들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집이 다 부서져서 오갈 데가 없었는데..."
토끼 부부 비온과 루리는 감격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토리와 리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잊고 지냈던 '정 많던 시절'로 돌아간 듯,
집 안에는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와 웃음소리가 감돌았습니다.
맛있는 식사 후, 차를 한 잔 나누던
아빠 토끼 비온이 문득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저기 숲 반대편에요.
그 가시돌들이 가득한 곳 말입니다.
혹시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토리는 순간 흠칫했습니다.
"아, 잘 알죠. 어릴 적에 멋모르고 갔다가
나무를 타는데 가시돌에 찔려서...
그 후로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저에겐... 트라우마 같은 곳이죠."
"아, 그러셨군요. 저도 그래서 늘 피해 다녔는데...
이번에 태풍을 피해 도망치던 중에 그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단단하던 가시돌들이 전부 땅에 쓰러져 있고,
심지어 몇몇은 벌어져 있지 뭐겠습니까!"
"저희도 워낙 정신없이 지나가다 본 거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내일 저희와 함께 가서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 무서운 곳으로 가자고요?
안 됩니다!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도토리 주우러 가야 합니다.
밀린 게 많아서..."
토리가 손사래를 쳤습니다.
엄마 토끼 루리도 간절하게 힘을 보탰습니다.
토리는 '가시돌'이라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했지만, 돌이 '벌어져 있었다'는
희한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아내 리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좋습니다.
내일 딱 하루만 가보지요.
대신 저희 일,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두 부부는 숲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 잔해들을
조심조심 치우고 넘으며,
토끼 가족이 말한 '그 숲'에 도착했습니다.
"아, 가시돌의 숲이라니...
정말 오랜만이군."
토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끝에,
마침내 그곳이 나타났습니다.
오래된 비밀을 품은 듯한 가시돌들이,
묘한 침묵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토리는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예전의 끔찍했던 아픔이 되살아나며,
숨이 가빠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리나, 난 아무래도 안 되겠어.
숨 쉬기가 힘들어...
어서 돌아가자. 우리 안전한 집으로..."
그때, 리나가 남편의 얼굴을 침착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날 봐, 토리. 내 눈을 똑바로 봐봐."
"당신이 늘 하린이와 리안이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주던 이야기,
생각 안 나?
당신 아버지께서 해주셨다는
그 용기에 대한 말씀 말이야."
멍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던 토리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시돌을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았습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제,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의 두 눈에 비친 것은 바로...
(다음 편 '아름다운 밤'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