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쓰는 일기 41 – 2025. 10. XX

깊어가는 가을 낮에

by 청효당

아내는 다음 달에 있을 민화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비가 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일과처럼 하고 있는, 오전 10시쯤에서 1시간 30분 내외의 아침 운동(정발산 오르기나 호수공원 돌기)도 며칠째 거르고 있다. 아침 식사 후 ‘비장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주식 창을 연다. 오늘도 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보합세에서 오르내린다. 주가지수가 4000포인트를 넘겼다고 ‘난리’인데 ‘이 좋은 장세’에 나는 별로 번 게 없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주도하는 장으로 주가지수는 기절할 만큼 올랐지만 재미 본 개인투자자가 소문만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한 달 남짓 사이에 배 이상 오른 종목이 ‘수두룩’해서 배가 아프긴 하다. ‘돈복’ 없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할 수밖에···. 우리나라 개인투자자의 평균 투자 금액이 3,000만 원 정도 된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기준으로 하면 투자 금액이 ‘잔돈’에 불과한 내가 돈복 운운 하니 좀 낯간지럽긴 한다.



전시회를 보러 가려고 10시에 집을 나섰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자하문로를 걷는다. 목적지는 사진 전문 전시관 류가헌이다. 그곳에서 지금 이한구 사진전 <깊고 더럽고 찬란한>이 열리고 있다. 1988년부터 2023년까지 청계천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다. 1970∼80년대를 관통해서 살아온 나 같은 세대에게 이런 사진들은 예사롭지 않다. 전시장 입구에 부착된 안내 글을 읽어 본다. ‘깊고 더럽고 찬란한’이라는 사진전 제목은 작가의 사진들을 본 문화평론가 박명욱의 말에서 따왔다는데, 작가의 청계천 사진들에 담긴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과 비루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찬탄’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80년대의 청계천 풍경, 그 일대에 밀집해 있던 공업사와 공구상,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점포 주인, 거리의 행상과 짐꾼과 행인들’을 담은 흑백의 사진들을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옛날 잡지를 구하러 뻔질나게 찾아갔던 헌책방들이 생각나고, 캄캄한 밤의 어둠 속에서 카바이드 불을 켜놓고 ‘이상한 사진’들을 팔던 세운상가, 그리고 삼일 자가 들어간 삼일아파트, 삼일고가도로, 삼일빌딩이 떠올랐다. 가사 속에 삼일로가 나오는 가요도 생각났다. 벽에 게시된 작가의 작업 노트 중 마지막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흐르는 물살처럼, 청계천의 한 시대가 흘러갔다. 사진기를 든 자로서 청계천의 일부로 함께 흘렀던 나의 두 손에도 노동자의 손처럼 몇 줌의 흑백사진이 들렸다. 흐르는 것의 무상함에, 이 흑백사진들이 눌러쓴 흑연 자국 같기를 바래본다.’

그렇다. 흐르는 물살처럼 한 시대가 흘러가고, 그 시대의 흔적을 담은 사진 앞에 서 있는 나도 흘러 흘러 이 자리에 와 있다.



류가헌을 나와 청와대 앞길을 지나 삼청동으로 간다. 류가헌에서 사진 전시회를 보는 날이면 정해놓은 것처럼 이 코스로 걷는다. 삼청동에 오면 늘 몇 년 전 한여름 땡볕 속에서 골목길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임석재 교수의 책 『서울, 골목길 풍경』을 읽고 시작한 첫 번째 답사길이었다. 이제 이 길은 셀 수 없을 만큼 오고 간 길이라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이 되었다. 임석재 교수는 책에서 삼청로를 ‘바바리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에게 어울리는 길로, 특히 비 오는 늦은 오후나 늦가을 해 넘어갈 때 묘한 감상을 부르는 길’이라고 적었다. 그 삼청로와 북촌로5나길로 뻗는 열세 갈래길(그중 여덟 갈래는 막다른 골목이고, 나머지 다섯 갈래가 양쪽 길을 연결한다)이 심청동 골목길을 형성한다. 책에 나오는 서울의 다른 골목길에 비해서는 비교적 짧고 힘도 덜 든다. 그 골목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며 정독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6,500원짜리 백반을 먹는다. 정독도서관을 드나든 지는 7년쯤 된다. 정독도서관은 집과, 내가 다닌 학교, 회사 등을 빼고 나면 아마 제일 많이 와 본 곳이 아닐까 싶다. 퇴직 후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기 위해 오기 시작한 후 때로는 강좌를 들으러, 때로는 무언가를 배우러, 그도 아니면 오늘처럼 밥을 먹거나 그냥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러. 식당에서 나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아서 깊어가는 가을 냄새를 맡는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곳인데 이제 낙엽만 무성할 뿐 한산한 풍경이다. 가끔 소리 내고 지나가는 바람이 가을 냄새를 날라 온다. 그렇게 30분쯤을 있다가 안국역으로 와서 전철을 타고 집에 왔다. 아내는 아직 민화 수업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미의 산책』이라는 고유섭(1905∼1944) 선생이 지은 책을 펴놓고 컴퓨터에 베끼기 시작한다. 이 책은 1982년 문공사文公社에서 자이언트문고 201권으로 나온 문고본이다. 아마 발행된 그 무렵에 산 책일 텐데 읽은 기억이 없다(그런데 책을 베끼려고 펼쳐보니 군데군데 줄이 쳐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래전에 몇 대목은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컴퓨터로 베껴 적기 시작한 지는 이주일이 되었는데, 너무 오래전 책이고, 또 문고본이라 글자가 ‘좁쌀만’한 데다 세로쓰기판이어서 몇 줄도 읽기가 어려워서 (그런데 읽고는 싶어서) 생각하다 컴퓨터로 베껴 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362쪽짜리 책인데 이제 40쪽을 베꼈으니 언제쯤 끝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시작을 잘했다 싶은 것이 우리 옛 미술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에 아주 적절한 책인 것 같아서다. 하루 한쪽을 베끼든 두 쪽을 베끼든 일과처럼 꾸준히 해야겠다. 이제 10월도 다 간다. 여기저기서 누군가의 노래가 들려올 것이다.


(표지 사진은 이한구 작가의 <청계천을 일터로 둔 삼일아파트 뒷동네(1992)>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