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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an 06. 2022

전등사 대웅전 추녀

어떤 지명은 특정한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그 사람과 일면식도 없는데도 그렇다. 이를테면 덕소와 수안보는 화가 장욱진을 생각나게 한다. 덕소와 수안보에 화가의 화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전등사를 생각하면 고은 시인이 떠오른다. 고은 시인이 승려였을 때 전등사 주지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여러 번 다녀왔다. 갯벌과 해수욕장에도 갔었고 마니산 참성단도 갔었다.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는 세 번이나 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전등사는 가 보질 못했다. 어제 그 전등사에 갔다 왔다. 며칠 전 TV에 함박눈이 내리는  전등사 대웅전의 모습이 나왔는데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정적에 잠긴 산사 풍경은 맑고 아름답기도 했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경건한 모습이기도 했다.

TV에서 본 눈 내리는 산사 풍경은 또 있다. 송광사였다. 법정 스님이 계시던 불일암으로 가는 산길이었다. 이미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 쌓인 길에 그래도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북해도에서 1년 동안 지내면서 원도, 한도 없이 본 눈인데 아직도 눈 내리는 풍경에 마음이 들뜨니·····      



가끔 들춰 보는 고은 시인의 오래전 책 『나의 방랑 나의 산화 – 고은 고사 편력古寺遍歷』의 전등사 편을 다시 읽어 보았다. 강화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는 삼랑산성三郎山城에 둘러싸여 있는 고찰古刹로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는데 ‘고려 충렬왕의 원비元妃인 정화 공주貞花公主가 인나印奈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찍어오게 해서 전등사에 두었고, 구슬의 등을 헌납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의 전등사란 이름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과거에 전등사는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일부, 그리고 강화도의 많은 말사末寺를 가진 본산本山이었다고 한다. 또 전등사에는 역대 사록史錄을 보존한 장사각藏史閣이 있었다. 이곳에서 고려대장경을 판각했다고 한다.         

고은 시인이 전등사 주지로 부임한 때는 1959년으로 되어 있다. 그의 책에 따르면 당시 전등사는 황량했다고 한다. 일본의 운양호雲揚號가 전등사를 둘러싼 삼랑성 서문 부근을 폭격하여 그 일대 많은 건물이 불타고 파괴되어 대웅전과 약사전 – 이 두 전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등의 당우 몇 채만이 남아 있었다. 고은 시인이 이 책을 쓴 것은 1974년이니 이미 반세기 가까이 지난 것인데 내 머리에 입력된 전등사의 모습은 바로 그 책에 기초해 있었다. 전등사를 향해 가는 그 시간에도 나는 막연히 조촐하고 황량한 절의 모습만을 상상했다.       



전등사 주차장에 차을 세우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종해루宗海樓를 향한다. 종해루는 정족산성의 남문에 해당한다. 남문을 지나 절 경내로 가다 보면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나이는 700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은 오시는 기회가 있으면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이 나무 말고도 300년 된 은행나무, 300년 된 팥배나무, 400년 된 느티나무 등 유달리 이 절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은 것 같다.



절 주위도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돌계단을 올라 전등사 현판이 걸린 문루文樓 - 대조루對潮樓 -를 지나 절 경내로 들어선다. 정면에 시간의 무게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대웅전은 내가 예상했던 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한편 일순 낯선 경내 풍경이 당황하게 했다. 대웅전 좌로 우로 여기저기 전각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의 책 속의 풍경만을 넣어 온 내 머릿속이 혼란해진 것이다. 얼핏 보아도 10여 채는 될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다. 하긴 이미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니 그 모습이 어찌 예전 그대로일 것인가. 절 경내에는 평일임에도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가깝기도 하고 산사임에도 차에서 내려 몇 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기도 해서일 것이다. 나들이하기에 이처럼 좋은 곳도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서운(?)한 기분이었다.     


대웅전
대웅전 추녀

대웅전에 앞에서 중년 남자 한 분이 같이 온 일행에게 추녀를 가리키며 열심히 무엇인가 설명을 하고 있다. 추녀에 조각된 여자 모습과 관련된 전설일 것이다. 전등사에 와 보지 않은 사람도 대웅전 추녀에 조각된 여자 모습에 얽힌 전설을 들은 분은 많을 것 같다. 고은 시인의 책에 이렇게 나온다. ‘전등사 창건 때 목수들을 통솔하는 도편수는 아침, 저녁으로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고 기둥을 다듬어가고 서까래를 올리는 것을 지휘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강화 저자에 있는 삼거리 주막의 젊은 주모였다. 그런데 그가 전등사를 짓는 동안 그녀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다. 그것을 비관하던 끝에 대웅전 추녀 위에 그녀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받쳐 놓았다.....여기서 언제까지나 무거운 추녀를 받들고 있는 괴로움으로 살아가라’는 저주를 담은 것이다. 그런데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주모가 목수의 재물을 훔쳐서였다고 한다. 굳이 어느 것이 사실인지 따져보지 않기로 한다. 사실이 무엇이든 성스러운 불당에 얽힌 해학적인 전설이 유쾌하지 않은가.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약사전은 망자亡者를 심판하는 현왕現王과 권속을 그린 불화佛畫인 현황탱現王幁과, 불상 뒤에 봉안하는 불화인 후불탱後佛幁이 유명하다고 한다.  극락전 아래 종각이 눈에 띈다. 철종鐵鐘이 들어 있는 종각이다. 이 철종은 중국 송나라 때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종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 복원된 사고지史庫趾가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과 왕실 국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금 떨어져서 정족산성 진지터가 있다. 정족진鼎足鎭은 사고史庫를 조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 주둔지였다. 고은 시인은 전등사에 맞는 감정을 허무감이라고 말하며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2천 년의 연혁을 간직하고 있는, 2천 년을 어디다가 버리고 저 혼자 남겨져 있는 전등사의 비애는 어쩌면 나 자신의 비애 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비애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강화의 곡절 많은 역사와 1600년 고찰 전등사의 내력을 살피게 하는 대목인 것 같다. 지금 전등사 모습에서 당시 시인이 느끼던 황량함을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그 쓸쓸한 정경을 떠올려볼 뿐이다. 절 경내를 나와 성곽을 따라 언덕 위로 올랐다. 멀리 강화군이 보인다. 바다 한 귀퉁이도 보인다. 성곽은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이어진다. 서문의 무지개형 다리에 올라서 보면 서해 바다와 마니산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포구에 들러 생선 몇 마리를 샀다. 내가 좋아하는 양미리도 샀다. 절에 다녀온 다음 날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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