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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Aug 08. 2023

혹서酷暑 · 피서避暑 · 내서耐暑

한여름 잡상

 ‘기왓장이 펄펄 뛰는 더위’. 이 표현은 문학청년이었던 막내 삼촌이(결국 문학가가 되지는 못하고 은행원으로 살았다) 자신이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그때 삼촌은 조카들에게 자신이 쓴 습작시 몇 편을 읽어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기억나는 구절은 이것밖에 없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더운 여름만 되면 나는 이 구절이 떠오른다. 요즘 정말 기왓장이 펄펄 뛸 만큼 더운 날이 연일 이어진다. 일본은 여름 더위를 하일(夏日, 나츠비), 진하일(眞夏日, 마나츠비), 맹서(猛暑, 모쇼)로 구별하는데 각각 섭씨 25도, 30도, 35도를 넘을 때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세부적인 기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우리 날씨가 이 기준에 따르면 가장 더운 맹서에 해당할 듯하다. 이런 더운 날씨에도 나는 일주일에 이, 삼일은 박물관에, 갤러리에, 또 문화교실에 가느라 땡볕을 걸어 다녔다. 가끔은 1시간 넘게 산길을 올라 도봉산 망월사에도 간다. 지하철 타는 구간을 빼면 거의 걷는 것이 습관이라 온몸은 땀범벅이고 때로는 현기증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를 보다 못한 아내의 심한 나무람(?)에 지금은 붓글씨 쓰러 가는 날만 겨우 외출을 한다. 집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여 요 며칠 동안은 동네 도서관으로 ‘피서’를 간다. 그런데 도서관 자료실도 만원이다.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많다. 간신히 창문을 따라 길게 놓인 좌석 하나를 잡아 건성으로 책 한 권을 펼쳐 놓고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그게 컴퓨터 전용 좌석이라며 예약자가 나타나 비켜달라고 해서 어정거리다 집에 오는 경우도 있다. 어제는 가자마자 겨우 자리 하나를 잡았는데, 거의 10분에 한 번씩 자리를 떠나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학생의 옆 자리였다. 그 학생은 나갔다 들어오면 가방에서 무슨 참고서를 꺼내서 뒤적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와서는 또 무슨 다른 책을 꺼내놓고 들척이다가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또 일어난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나도 책은 덮어놓고 핸드폰을 검색한다. 한 달 전에 캐나다에 사는 딸네 집에 간 친구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이야 가라’ 하는 글자와 함께 카톡방에 올라 와 있다. 멋진 모자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었다. 날씨는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라며 원 없이 골프도 치고 여행도 하면서 몇 달쯤 지내다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걸 보고 한 친구는 ‘나는 얼마 전에 뉴욕 사는 아들 보러 갔다 왔는데 며느리 눈치가 보여 일주일 만에 왔다. 너는 딸이라 좋겠다’고 적었다. 또 어떤 친구는 열대야 표시라며 대야 열 개 그림을 올렸다가 ‘아제 개그’ 그만하라며 ‘집중 질타’를 받았다.       



제목으로 쓴 '내서'라는 말은 더위를 견딘다는 뜻일 텐데 이규태 선생의 칼럼에서 보았다. 그 칼럼을 보면 인도 미하르 지방은 섭씨 50도가 넘는 날이 몇 달간 계속되는데 그런 더위 속에서도 둘레에 숯불을 피워 놓고 고행苦行하는 사람도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내서지수가 서양 사람의 그것보다 3배나 높다고 한다. 우리말에 이열치열이라는 것도 내수지수를 높여 여름을 견디는 일종의 지혜라고 하겠다. 하지와 입추 사이에는 간지가 경庚에 해당하는 날이 세 번 있다. 이것이 초복, 중복, 말복이다. 복날은 추위를 주관하는 금金의 기운이 바짝 엎드린다는 복伏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여름철 보양식도 여름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복날에 먹는 개장국이나 삼계탕이 그 대표적이겠다. 개장국이 여름철의 보양식이라지만(나는 먹어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삼계탕을 가장 많이 먹을 것이다. 삼계탕은 닭에 찹쌀, 인삼, 대추 등을 넣는데 인삼 뿌리나 대추를 넣을 때는 1,3,5,7··· 홀 수 개를 넣어야 보신이 되는 징크스가 있다고 한다. 복날에 붉은팥으로 죽을 끓여 먹는 습속도 있었던 것 같다. 홍승면의 『백미백상』이나 최승범의 『풍미산책』에 소개되는 여름 음식에는 지금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옛날’ 음식들이 나온다. 골무떡이라는 것이 있는데 떡가래를 골무처럼 둥글게 단자를 만들어 차가운 꿀물에 적셔 먹었으며 수단水團이라고 했다. 자기 나이 수만큼 먹어야 몸에 좋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청채靑菜와 닭고기를 섞어 어저귀국에 말아먹기도 하고, 미역국에 닭고기를 섞고 국수를 넣어 익혀 먹고, 호박과 돼지고기를 섞은 데다 흰 떡을 썰어 넣고 푹 고아먹기도 했다는데 나도 그런 음식은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냉면, 장어, 쌍치쌈, 호박잎쌈, 콩국수 등은 지금도 여름에 많이 먹는 음식들이다. 며칠 전에도 아내와 인사동에 갈 일이 있어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었다. ‘콩국수’라니까 콩으로 만든 국수 같지만 ‘콩국 국수’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중국에서는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 여름이면 수박화채가 생각난다. 어릴 때는 여름이면 으레 먹던 음식인데 이제는 먹어 본 기억이 삼삼하다. 우리나라는 화채에 오미자 국물을 쓰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인스턴트 식품이 넘쳐 나는 시대이다. 어릴 때 먹던 음식들은 이제 미각의 기억조차 아스라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이 복 더위에 장례식장을 여러 군데 다녀왔다. 직장 3년 선배의 본인상에, 1년 선배의 배우자상, 그리고 집안 어른 두 분의 초상이 있었다. 상주들의 검은색 상복이 유난히도 덥게 보여 더욱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올해 백수인 어머니는 여름이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이 복더위는 피해서 선선한 바람 불 때는 그만 가야 할 텐데···. 물론 큰일 치를 자식들을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일 게다. 예전 동남아 더운 나라에 근무할 땐데 그들은 자기 나라도 계절이 있다고 했다. hot season, hotter season, hottest season이라고. hot season에는 가죽점퍼 같은 두툼한 옷을 입고 다니는 젊은이도 많았다. 그 말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 미묘한 더위 차이가 그런 복장 변화의 원인인지, 아니면 두툼한 옷이 입고 싶어서 그런 명분을 붙인 건지. 이제 곧 말복이다. 영원한 여름은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가을은 온다. 물론 그 가을도 영원하지 않다.


(표지는 이해광 작가의 카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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