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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기랜드 May 23. 2023

부부의 세계 (11)

내적스펙

올해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5년 차 되는 해이다. 15년 차라는 부부의 삶 속에는 정말인지 영화 한 편을 찍어도 될 만큼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부부의 인생 스토리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부부의 세계를 진액만 쭉 짜서 모아 본다면 그것은 단연코 ‘인내심’이다. 나의 약점이기도 한 인내심의 영역은 부부의 삶을 통해 가장 많이 훈련되고 단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혼자 살았다면 굳이 겪어도 되지 않을 것들이지만 부부로 인연을 맺었다면 함께 맞춰나가야 하는 삶이기에 각자의 연약한 부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난 평소에 듣기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러 번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내겐 너무 힘든 부분이었다. 이래서 내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했나 보다. 반복 듣기 훈련이 약했으니 말이다. 결혼 후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했던 얘기를 또 하지?… 별일 아닌 거 같은데 왜 저리 심각하게 말하지?…” 우린 대화의 방식도 문제를 대하는 태도도 해결방법도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게 없었다. 문제 앞에 공감을 원하는 남편이었고 난 문제해결력을 먼저 제시하는 아내였으니 말이다.


결론을 빨리 내리는 나와는 달리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걷는 남편의 성향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남편은 일어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문제의 사건을 일으킨 사람의 심리까지 파고들며 왜 그랬을까? 무슨 심리였을까? 상황별로 상대의 말투 태도 표정까지 되뇌며 나에게 의견을 지속적으로 묻는 타입이었다. 내 나름 결론을 내려주면 그 결론의 이유를 또 묻고 묻는 꼬리물기식의 대화법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난 남편의 심리 상담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듣는 게 힘들어 대화 도중에 딴청이라도 피우면 남편은 그걸 또 지적하며 그렇게 서운해한다. 여태 들어준 건 진심의 자세가 아닌 걸로 되어버리고 만다. 솔직히 때로는 지친다. 지쳐. 귀에서 피 안 나면 다행이다. 아니다. 나름 피딱지로 살아온 지 15년 차이니 이제는 귀에도 굳은살이 배겨서 장시간 어떤 얘기도 들을 수 있는 듣기 훈련이 강화되었다.  어쩌다 보니 약점이 강점으로 변한 것이다. 내적 스펙하나 성공한 셈이다.


이제 부부 수다 15년 차! 그 사이 남편도 나도 대화의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나름 핵심전달 토크를 잘  유지하고 있다. 평일은 남편 퇴근이 늦으니 정말 대화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저 생사여부 확인하는 수준이랄까? 정말 꼭 필요한 전달사항만 주고받는다. 그 후 못다 한 이야기는 주말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몰아서 얘기하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누가 보면 금실 좋은 부부로 알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다. 적당히 잘 지내는 사이이다.


그렇게 인내심이라는 영역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약점이 단련되고 훈련되고 강화되었을 때쯤 이것은 단순히 나만을 위함이 아닌 나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필수 밑 작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유전자는 강하다. 아이가 한수 위인 것이다. 아직도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인내심의 단계가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아이를 양육한다는 건 이것은 인내심의 최상위권 레벨이며 이것을 통과한 부모는 최강의 내적스펙을 장착함 셈이다. 어쩌겠는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양육을 통해 인내심 끝판왕을 경험하는 중이다. 슬슬 사춘기 시즌이 겁이 난다. 요즘 들어 딸아이는 내가 묻는 말에 “싫어! 안 해!”부터 뱉어 내기 시작한다. 설마… 벌써 시작된 건가 싶다. 더 늦은 출산이었거나 자식이 둘셋이었으면 나의 갱년기와 마주친 그 자식과의 대화는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스토리이다.


부부의 삶을 통해 인내심 말고도 또 하나 다져진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인정하기’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그리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 말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배우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며 난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빠른 인정이야 말로 장수의 비결이라 말하고 싶다.


살다 보면 부부싸움 안 할 수가 없다. 인생은 매 순간이 결정이고 그의 따른 결과를 맛보며 살아간다. 실패를 맛보게 되면 ‘뭐야!! 네 결정을 믿은 게 내 실수지… 내가 미쳤지…..’ 반면, 성공을 맛보게 되면 ’ 역시 내 말대로 하길 잘했지? 나만 믿고 따라와!’ 등등 부부는 늘 합의를 통해 얻어내는 결과를 가지고 때론 다투기도 하고 흐뭇해하기도 한다.


살면서 분명 해지는 건 상대가 잘하는 분야는 따지지 말고 그냥 한 번쯤은 믿고 맡겨보자. 그리고 그의 따른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자. 신뢰라는 부분은 이런 결정을 통해 돈독해진다. 상대가 나보다 돈관리를 잘한다면 차라리 용돈 받아 쓰는 삶이 지출을 좀 더 줄일 수 있는 방법이고 상대가 나보다 재테크에 관심이 많다면 소소하게라도 다양한 투자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다.


변화는 시도가 필요하고 그 시도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서로 노력한 것을 인정해 주고 ‘인생공부 멋지게 했네!‘라고 웃어버릴 수 있는 여유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내린 결정 앞에 상대를 비웃거나 지나친 잔소리와 의심은 좋지 않다. 잘 될 것이라는 용기와 믿음이 더 필요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부는 영역 나누기를 잘하는 편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 집은 청소에도 자신만의 영역이 있다.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두 개 있는데 안방 화장실은 주로 나와 딸이 사용하고 거실 화장실은 남편과 손님들이 사용하는 화장실로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각자 청소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누어 사용하면 ‘화장실 좀 깨끗이 써라. 치약 좀 잘 짜라 ‘하는 잔소리가 없어진다. 내가 사용하는 영역만 잘 정리하면 되니깐 말이다. 결과가 어떨 것 같은가? 생각 의외로 남편 화장실은 물기가 별로 없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맡기면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주어진 일은 깔끔하게 잘할 사람인게 눈에 보였다.


여행을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운전은 남편의 영역이고 여행 스케줄은 나의 영역이다. 안전 운전하기만을 바랄 뿐이지 운전 스타일까지는 간섭하지 않는다. 운전 중에 상대차를 보며 불만을 표출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난 창문밖만 바라본다. 내가 운전하는 게 아니면 나라도 조용히 있는 게 안전한 운전길이니 말이다. 남편 또한 내가 준비한 여행 스케줄에 큰 불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되도록 갔던 곳 말고 새로운 여행지를 고르는 편이라 서로 구경하기도 바쁘다. 이렇게 먼 길까지 운전하고 여행스케줄 대로 움직여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 주어진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상황이니 그저 즐거운 추억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가정 안에서 영역을 나눌수록 일처리가 쉬워지고 잔소리가 줄어든다. 공동체라면 나누어 일하는 게 마땅하다.


한편 부부싸움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지 말자. 또 싸우더라도 이성은 찾고 싸우자. 막말이 심해지면 싸우고 나서 후유증도 심하더라. 싸움도 기술이니 뱉을 단어 들고 생각하고 말해야 그나마 상처가 덜 깊다. 쉽지는 않지만 부부라면 길러야 할 내적 조절의 힘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옛말이다. 지금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칼로 상대를 찌를 수 있는 독한 세상이다. 그만큼 싸움은 화를 타고 집을 불태울 만큼 무서운 화력이 있다.


싸움의 기술만큼 중요한 화해의 기술도 빼놓을 수 없다. 화해는 마음 급한 사람이 먼저 청한다 한들 화는 성격대로 각자 풀리는 시간들이 다 다르다. 내가 지금 ‘미안해! 그니깐 이제 화 풀어!’라고 말해도 그 순간은 화해가 되는 모양처럼 보이지만 내 안의 화를 식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를 아직도 내냐고 다그칠 필요도 없고, 뒤끝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화는 무처럼 쉽게 잘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식혀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숨이 왜 나오겠는가. 내 안의 뜨거운 화를 뱉는 것과 같다. 다 뱉어내야 그제야 화가 풀린 것이다.


재촉은 금물이다. 내 화가 풀렸다고 해서 상대방도 그렇다고 여기는 건 착각이다. 눈치 좀 챙기자. 그렇다고 화를 쌓아두지는 말자. 명치 쪽이 자주 답답하고 무거운 게 느껴진다면 그건 화병이다. 화병은 나만 손해다. 가볍게 털어버릴 줄 도 알아야 한다. 과거의 화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것 또한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화는 물로 다스리자. 흘려보내야 한다. 내 안에서 멀리멀리 말이다. 화가 날 땐 내 안의 물길을 그리자. 하루하루 흘려보내다 보면 화는 물에 꺼질 것이다. 그 외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정폭력이나 도박, 알코올중독 등등 가족 모두를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것들이 내 배우자에게 있다면 그건 인내할 필요도, 인정할 필요도, 개선할 필요도 없이 그저 갈라서는 게 답이다.


딱히 부부 15년 차 노하우는 별거 없다. 난 그저 자기만의 영역을 정확하게 구분 지어 놓으면 싸움이 줄어들고 상대를 알게 되며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불어 여전히 내적스펙도 쌓는 중이다. 인내심… 인정하기… 자기 조절의 힘… 그리고 또 무엇이 나의 스펙을 올려놓을지 앞으로의 삶도 기대해 본다. 우린 그렇게 여전히 부부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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