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오아시스
평범한 하루가 시작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하루를 살다 보면 그 익숙함이 때로는 지루함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마치 건조한 사막에서 사는 삶이랄까? 그저 살아가기 바빠서 육아에 지쳐서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나의 메마른 감정들은 나도 모르게 쌓이고 쌓여서 나에게 설렘을 잊게 한다.
평범한 하루가 다시 설렘으로 시작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내 심장소리가 밖으로 들릴만큼 첫사랑을 시작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다시 한번 열정적이고 몰입되고 설레고 사랑할 수 있을까? 무엇이 나를 설레게 할 것인가? 그 설렘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난 오아시스를 발견하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했다. 그 평범한 하루 속에서 데이트 약속이다. 정말 오랜만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언니를 4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우린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어색함 없이 반기며 카페에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늘 언니의 고민이었던 임신. 이젠 나이가 들어서 포기하기로 했다며 그냥 남편이랑 단둘이 친구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비숑 프리제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며 강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어찌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던지 예전의 어둡던 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너무 밝아진 언니 모습을 보며 언니가 얼마나 반려견을 사랑하고 예뻐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언니가 얘기하더라. 40대가 되면서 갑자기 인생이 재미없고, 일하기도 싫고, 남편이 있어도 남처럼 느껴지고, 자식도 없어서 외롭다고 느껴져 한동안 우울증이 심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드럼이 아니었으면 자기는 아마도 이혼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고 열심히 두드리며 드럼에 몰입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렸고 힘들었을 때 들었던 드럼연주 음악들이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남편이 집에 혼자 있는 내 모습이 짠해 보였다며 강아지라도 키우면서 좀 웃으라고 비숑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그 후로 서먹했던 남편과도 강아지로 인해할 얘기가 많아졌고 안 하던 산책을 셋이서 매일 하기 시작하면서 부부사이도 좋아졌다고 한다. 요즘은 반려견 없는 하루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얘 때문에 많이 웃고 산다며 그렇게 행복한 삶을 말해주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언니만의 또 다른 사랑을 키워내고 지켜가는 게 다시금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준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나도 새로운 설렘과 몰입이 필요한 시점인데 난 언니처럼 강아지를 키울 자신은 없었다. 무엇인가 책임지고 키운다는 게 이미 자식을 통해서도 배우고 있는 중이라 섣불리 또 다른 생명을 키워야 한다는 건 설렘이 아닌 잘 키워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는 것 같아서 난 그쪽 영역은 아니었다. 난 오히려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보다 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올릴 때 그때 집중력이 더 높은 타입이다. 그래서 기도나 명상이 내 삶 속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주말에 가족과 나들이로 서점을 방문했다. 딸아이는 스티커북에 푹 빠져서 이것저것 구경하기 바빴고 남편은 그 틈에 커피 한잔 마시며 의자에 앉아 여유를 즐겼고 난 익숙한 육아서적에서 벗어나 요즘 뜨는 에세이, 소설, 베스트셀러는 어떤 책들인지 신간코너를 쭉 돌고 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문장 하나. 그건 바로 ‘글쓰기 좋은 시대다.‘라는 문구였다. ’ 글쓰기? 좋은 시대? 누구나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건가?‘ 순간 그 한 문장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 나도 할 수 있을까? 나도 쓸 수 있을까? 국어를 잘해야 하나? 문예창작 학과 아닌데 난…‘ 그 짧은 시간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치면서 내 마음에 왠지 모를 끌림이 생겼다.
나의 글쓰기 이력은 학창 시절 독후감으로 상을 받아본 게 전부였다. 그런 내가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책들 사이에 내가 쓴 책이 꽂혀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알 수 없는 설렘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순간 ‘이건가? 내가 찾고 있던 영역이?’ 나의 건조하고 사막 같은 삶 속에 오아시스가 되어줄 그것이 바로 ‘글쓰기’인가 싶었다.
나의 목마름을 채워줄 그것. 나의 열정과 몰입을 통해 에너지를 창출해 줄 그것. 나에게 새로운 설렘을 느끼게 할 그것. 그것이 이 자리 한편에 놓일 내 책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그 자리에서 난생처음 작가라는 꿈을 새기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눈에 들어온 한 문장이 내 인생을 새롭게 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주제로 글을 쓰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내가 쓸 수 있는 주제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았다.
난 지식인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창의력이 풍부해서 재미난 소설을 쓸 자신도 없다. 그저 내가 살아온 삶을 소소하게 나눌 수 있는 주제면 된다고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생각이 글로 써지는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면서 언제가 한 번은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분해하는 일이었다. 내 삶을,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정신을 포함한 내 전 영역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해하는 시점이 40대부터여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무작정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 30대의 시기에서 벗어나 40대에 인생의 브레이크 한 번 걸어준 것이 얼마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귀한 시점인지 난 지금도 글을 써 내려가면서 더욱더 깨닫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글쓰기가 너무 좋다. 아니 첫사랑을 시작한 여인처럼 글쓰기를 사랑하고 있다. 나의 일상들이 기록되며 그것을 새롭게 관찰하게 되는 나의 하루하루가 난 즐거웠다. 나를 분해하며 내면의 몰입이 깊어질수록 생성되는 또 다른 에너지들은 나에게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고 매번 글쓰기가 새로운 도전거리가 되면서 난 글을 쓸 때마다 신나게 노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40대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게 해 줄 나만의 도피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선택은 다양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동호회가입, 또는 자기 계발을 위한 자격증이나 재테크공부, 그 외 종교활동이나 봉사활동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몰입을 통해 나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내 삶에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오아시스에 새로운 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좀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