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배웠으면 좋을 네덜란드 교통 문화

길 위의 진짜 주인공은 차가 아니라 사람이다

by 이루다니

"사람이 미래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한국의 광고와 선거 캐치프레이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사람'이 들어간 슬로건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사람을 우선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한국에 살 때는 이런 슬로건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도로 위에서는 더욱 그랬다.


우회전 차량에 치여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나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 기사를 접할 때도 "사람이 우선인 한국에서는 문제를 잘 해결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은 법과 제도를 신속하게 바꾸는 일에 능숙했다. 보행자 우선 시 우회전 금지, 어린이 보호구역 시속 30km 이하 운행 같은 규정을 즉시 만들어 현실에 반영했다. 단속도 강화하고 CCTV도 촘촘히 설치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슷한 사고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법과 제도는 완비했는데 여전히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두고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당시의 나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네덜란드에서 발견한 것들

네덜란드에서 생활하면서 내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의 다양한 시설물들을 보며 안전은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실제 환경의 설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네덜란드에서 운전할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우회전 신호등이었다. 한국에서는 직진 신호가 켜지면 우회전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회전 전용 신호가 따로 있었다. 빨간불이 켜지고 차들이 멈추었다. 뒤차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신호에 따라 차량이 움직이고 있었다.


운전자는 보행자의 파란불과 뒤차의 움직임을 동시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신호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단순한 장치 하나로 우회전 사고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어린이 보호구역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CCTV나 단속 카메라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도로가 말을 걸어왔다. 차선이 좁아지고 양옆에 화분이나 볼라드가 나타나고 과속 방지턱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차량이 멈췄다가 천천히 지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단속이 아니라 환경이 행동을 유도하고 있었다. 스스로 속도를 줄이게 만드는 설계였다.


도심을 벗어나면 신호등 대신 라운드어바웃(회전교차로)이 많았다. 처음엔 헷갈렸지만 익숙해지자 오히려 편했다. 신호 대기 없이 자연스럽게 흐름을 만들어가는 경험이 신선했다. 운전자들이 스스로 교통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운전하면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차량이 없는 도로에서는 빨간불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도로 바닥 센서가 실시간으로 차량 흐름을 체크해 신호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교통량에 따라 신호등이 탄력적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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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 속에 담긴 철학

흥미로운 건 네덜란드의 도로는 차량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도심에는 양방향 도로보다 일방통행이 더 많고, 주거 지역으로 들어갈 경우 우리나라처럼 여러 방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많은 마을은 진입로가 단 하나뿐이라 운전자는 종종 긴 길을 돌아가야 자신의 집에 도착할 수 있다. 길을 잘못 들면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처음엔 불편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불편함은 의도된 것이었다. 차량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추고, 자전거 이동이 많은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자동차 도로만큼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추어져있는 네덜란드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차량에 선팅이 없다는 것이다. 보행자와 운전자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 있다. 시선이 닿으니 자연스레 양보와 배려가 오간다. 손짓 하나로 대화가 되고 도로가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 된다. 선팅으로 가려진 차 안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소통이었다.




근본적인 차이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건 차량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차이였다. 한국은 "사람이 우선"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차량이 우선"인 나라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이동시키는 데 중심이 맞춰져 있다. 넓은 도로, 차량 중심 신호 체계, 차량의 흐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설계.


반면 네덜란드는 차량을 후순위에 둔다. 도시 곳곳의 시설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불편하더라도, 돌아가더라도, 느리더라도 사람이 안전한 것이 우선이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 한국에서 발생했던 우회전 사고나 어린이 보호구역의 사고들은 물리적 장치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단속 카메라를 늘리고 벌금을 올리는 것보다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작은 변화부터

사람이 우선이라고 하면 이제 자동차에 대한 생각부터 바꿔보면 어떨까. 물론 자동차는 사적인 공간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도로 위를 다닐 때는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유재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변화는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회전 신호등을 하나씩 늘리는 것, 어린이 보호구역에 물리적 속도 제한 장치를 설치하는 것, 주거 지역 진입로를 재설계하는 것. 이런 작은 변화들이 모여 큰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차량 선팅을 벗기는 것도 그중 하나다. 서로의 눈빛을 마주 보며 양보하고 배려하는 문화. 단속과 벌금이 아니라 자발적인 존중으로 만들어지는 교통 문화. 선팅 하나만 없어도 길 위의 풍경은 달라질 수 있다.


법과 제도를 통해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환경과 인식의 변화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시설물이 그에 맞게 설계된다면, 더 이상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길 위의 진짜 주인공은 차가 아니라 사람이다. 작은 것부터 바꾸면 큰 문화도 바뀐다. "사람이 미래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라는 문구가 화면과 광고 속 지면이 아닌 실생활에서도 체감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진짜 '사람이 먼저'인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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