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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와 사랑 May 07. 2024

잃어버린 아내 34

조금은 지쳐있는 나날이 지속되던 중 아들이 "엄마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내일 낚시나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하여 바람도 쐴 겸 해서 다음날 낮 12시쯤 채비를 챙겨서 낚시터를 찾았는데 의자가 쓰러질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사람들도 없고 내가 앉으려던 자리 오른쪽 끝에 한 사람 그리고 건너편에 한 사람 나까지 세 명이 전부였다. 망설이다가 아들이 모처럼 내준 시간이라 낚싯대를 폈는데 물결이 심하게 출렁여 입질이 오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2시간 동안 한수도 못 건지고 미끼만 갈아 끼우고 있는데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심심치 않게 큰 놈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오른쪽 조사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떡밥 배합, 입질이 어떻게 오는가? 몇 칸대를 어느 방향으로 던졌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내 자리에 와 앉아서 찌를 바라보고 있는데 여전히 입질이 없다. 주변 풍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오른쪽 조사님이 오늘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낚시가 안된다며 낚싯대를 거둬 철수하였다.

조사가 떠난 자리로 옮겨 조사가 폈던 낚싯대와 같은 길이의 낚싯대를 조사와 같은 45° 방향으로 편 후 한 시간쯤 지나자 10분 간격으로 계속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물결이 심하게 출렁이는데도 입질을 볼 수 있어 40cm 붕어 등 덩치급 몇 수의 손맛을 본 후 저녁 7시쯤 철수하였다. 낚시는 포인트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 낚시에 입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여 전 여름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외삼촌의 농장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외삼촌과 동업을 하던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낚시를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곳이 운암댐(옥정호)이었다. 정읍에서 칠보를 지나 그때까지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던 산길을 꾸불꾸불 한참을 지나 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운암댐에 도착했는데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30여 마리가 넘는 흑염소 떼를 몰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맨 앞에 있는 한 마리만 몰고 가는데 나머지 염소들이 뒤따라가는 것이었다. 해가 지기 2시간쯤 전부터 사람의 왕래가 없고 수심이 깊은 곳에 자리한 아저씨와 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멍텅구리(인찌끼) 낚시를 하던 내게는 간간히 붕어가 한 마리씩 잡히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밤 10시가 넘도록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저씨는 말이 없어졌고 말을 할 때도 속삭이듯 말하였다. 처음에는 초짜인 내가 아저씨보다 많이 잡았다는데 으쓱해하고 있었는데 밤 12시가 다되도록 잔챙이 붕어 몇 마리밖에 잡지 못한 것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면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따라 그믐달이어서 캄캄한 산속 호숫가에 적막이 감돌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아저씨 곁으로 갔더니 낚싯대를 두 손으로 곧추 세우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고 아저씨는 내게 뜰채를 펴서 물에 담그라고 했다. 몇 분간의 힘겨루기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팔뚝만 한 잉어였다. 나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었고 아저씨가 뜰채로 떠달라고 해서 뜰채를 갔다 댔는데 잉어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뜰채를 피해 갔다. 한 번의 실패 끝에 건져 올린 잉어는 68cm짜리 대물이었다. 나는 놀라서 “엄청 크네요!”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아저씨는 별로 크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까지 낚시를 잘 몰랐던 나는 한편으로는‘잉어 한 마리 잡으려고 밤새 그 고생을 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훗날 낚시를 자주 다니게 되었을 때 그날 아저씨가 잡은 잉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준비와 기다림 끝에 올린 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낚시를 가기 며칠 전부터 낚싯대를 점검하였고 대물 채비인 지누 5호라는 대물용 낚싯바늘을 일일이 손으로 묶으며 한번 걸으면 놓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곤 했다. 댐에서 68cm 잉어를 끌어올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훗날에야 할 수 있었다.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혼자서 낚시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낚시를 그렇게 배운 탓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큰 바늘을 일일이 묶어서 사용하던 내 낚시생활의 정점은 교도관이 되기 전 2년여 전부터 교도관이 된 후 3년여간이었는데 물 좋고 경치 좋은 낚시터를 찾아다니며 대물 위주의 낚시를 하곤 했다.



  낚시터에 앉으면 새삼 모든 시름을 잊고 낚시에 빠져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마음으로 일상생활로 돌아가곤 했다. 아들 덕분에 모처럼 힐링의 시간을 가지며 재충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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