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구석이 있는 인간의 표정이란

by 거북이
파올로 우첼로 용과 싸우는 게오르기우스.jpg

올해 7월 새로운 과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매일을 불편한 마음으로 출근했습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키가 크셨던 과장님은 거침없으시며 불같으신 분이셨습니다. 보고서에 잦은 오타나 비논리성이 나타나면 보고 받는 것을 그만두셨습니다. '이런식이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겠네. 관련자들한테 바로 보고 받겠어요'


어쩌면 과장님의 방법은 깔끔하고 문제해결에 탁월하여 매우 도움이 되는 방식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복잡해지고 심란해졌습니다.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애써서 보고서를 작성 했는데 과정은 뒤로하고 결과만 바라보는 과장님께 원망의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자꾸 틀리는 나 자신에게도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오류 투성이 보고서로 인해 과장님이 역정을 내신 날은 팀장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시고 '정신 차리라'고 말 한 것입니다. 나는 팀장님께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이게 한계인 것 같아 나도 너무 힘이 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팀장님께서는 ‘그래도 정신차려야 한다’고 매번 말씀하셨지요. 아마 과장님의 지적이, 바로 내 직속상사인 팀장님에게서도 듣기 힘든 소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일이 1월부터 총 5번 있었습니다.


일을 한지 20년만에 나는 내가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10년쯤 일하고 나서 사라졌던 월요병이 다시 생겼습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내가 맡은 업무 분야가 ‘사회복지’파트였고 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사는 매일 아침 8시 30분에 있는 간부님들의 회의 주제 였기에 거의 매일 아침마다 과장님 서브 자료를 챙겨드려야 했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라는 그림에 나오는 용을 매번 새로운 과제를 던지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정여울 작가의 용은 '너는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거야' '너는 결코 네 꿈을 이루지 못할 거야' 라는 말을 늘상 속상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365일 글쓰기’라는 날선 창으로 용을 무찌릅니다. 결국에는 2년간 이 그림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없앨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에게 있어 그림속 용은 ‘삶’입니다. ‘삶’은 나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마구 던집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 과거로부터 학습된 불안감에 나는 무자비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용은 무찔렀다 할지라도 캄캄한 동굴 속에서 차례로 나올 것입니다. 심지어 몇 마리가 들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과 어떻게 하면 무탈히 공존하며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처음에 용을 무찌른다는 것, 두려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두려움과 함께 한다는 것은 환상이 아닐까? 한낱 헛된 기대와 희망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정녕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허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정여울 작가가 그랬듯 나 역시 파올로 우첼로가 1470년경에 그린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속에서 나만의 답을 찾았습니다.


용의 왼편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평온한 표정의 공주가 있습니다. 백마탄 왕자가 꽂은 날선 창에 몸부림치며 피를 흘리는 용의 비명소리가 들릴텐데도 공주는 마치 모든 것을 관망하듯 이 상황 속에 존재합니다. 용의 머리에 창을 꽂은 기사의 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물인 용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법도, 창을 던지면서 기합을 넣지도 않았습니다. 감는 듯한 눈의 한없이 고요한 얼굴입니다. 지상에서는 용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창을 손에 쥔 기사의 손에서는 땀이 나고 심장은 두근거리는데 하늘은 또 왜 저렇게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고 푸르기만 할까요. 다만 백마탄 기사의 머리위에만 기사나 공주의 긴장된 마음과 얼굴 표정을 대신하는 듯한 먹구름만이 일 뿐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될 일은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받은 인간은 결국 용을 무찌를 수 밖에 없는 운명일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인간의 표정입니다. 오늘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안과 두려움이 일 때 나의 표정은 과연 평온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보다 먼저 앞서 간 이들의 뒤를 살며시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맨 앞에 선 이들은 사랑하라고 맨날 외치고 다녔던 예수와 인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예를 갖추라 했던 공자, 그리고 ‘나는 모른다’고 말한 솔직하고 용감했던 소크라테스 등등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아주 아주 긴 행렬들... 앞에 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어 참말로 든든합니다. 참말로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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