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oddity - 진수 애인 이야기

by 고갱이

"1시 기차니까 12시 반쯤 만나면 되겠다. 그럼 커피 한잔 사서 출발할 수 있겠지?"

진수의 말에 내가 말했다.

"그럼 난 11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11시 반이면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겠지. 12시가 되기 전에 도착해서 커피를 사 들고 널 기다리고 있을래."

진수는 네가 무슨 여우냐며 웃었다.


토요일이 되었다. 나는 4호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11시 55분에 지하철에서 내려 56분에 개찰구를 통과했다. 12시에 역 밖으로 나와 서울역 광장을 가로질렀다. 던킨도너츠에 들러 커피 두 잔과 먼치킨 10개 세트를 포장했다. 11분에 시계탑에 도착하여 지하철역 쪽을 향해 섰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진수가 보인다. 기다릴 것이라는 내 말에 진수도 서둘렀을 것이다. 잰걸음으로 뛰듯이 다가오는 모습에 괜히 미안하다. 12분, 진수의 얼굴이 보인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달렸는지 숨이 가빠 보인다. 13분, 나를 발견한 진수가 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포클레인 한대가 달려와 진수를 덮쳤다. 12시 13분 12초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12시 13분 17초, 내 발밑으로 하얀 도넛이 뒹굴었다.

12시 13분 25초, 흐르는 까만 커피가 나를 집어 삼켰다.

그러게 나는 왜 쓸데없이 일찍 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을까. 12시 30분에 만나도 기차 시간은 충분했다. 12시 정각에 지하철역 안에서 만나서 같이 커피를 사러 갔더라면. 그냥 각자 표를 갖고 출발 직전 기차 플랫폼 안에서 만나자고 했더라면. 나의 철없는 막연함이 진수의 시간을 통채로 뭉개버렸다.


분 단위로 시간을 따지는 것은 나의 습관이다. 출발시각이나 도착시각, 시작 시각, 끝나는 시각, 예정된 시각... 생활 속 모든 시간을 말할 때 1분 단위로 말한다.

"7시 34분 도착 예정이야."

"6시 52분 지하철을 타야 하니까 집에서 6시 28분에 나갈 거야."

"이 고기는 200도 오븐에서 음.... 41분 동안 익히면 적당할 것 같아. 22분이 지났을 때 한번 뒤집어야겠어."


"보통 사람들은 정각이나 30분 단위로 시간을 얘기하지 않나? 아니면 15분이나 10분?"

남편이 묻는다.


언젠가부터 나는 줄곧 시간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살 때 텅 빈 집에서 외출한 엄마를 기다리는 한 시간은 종일 같고, TV에서 하는 만화영화 상영 시간 20분은 5분처럼 느껴진 것이 시작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5분은 15분 같고 시험 시간 마지막 5분은 15초 같다. 하루 스물네 시간은 남들 몰래 약 올리듯 내 앞에서만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곤 한다. 진수를 기다리는 30분은 잠깐일 것이었다. 하지만 진수가 죽는 그 순간은 십 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놀란 나는 시계를 노려본다. 시침은 분침과 함께 천연덕스러울만큼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나를 놀려대는 시간에 숨이 막힌다. 나는 최소한 경, 쯤, 반과 같은 애매함에 더는 놀아나지 않기로 한다.


신혼 때 남편이 사 온 벽걸이 시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디지털시계는 1분 단위 시간을 정확히 표현해주는데, 그 벽걸이 시계는 숫자조차 쓰여 있지 않은 아날로그 시계였다. 구멍처럼 비어있는 원안에서 길이가 다른 바늘 두 개가 무한 회전하는 시계는 아득한 블랙홀같다. 나는 관제탑으로부터 신호가 와도 답을 할 수 없는 톰 소령(*)이 된 기분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분 단위로 말하면 내가 그 시간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고 내가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리송한 표정의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던 차에 방에 있던 아이가 나와 냉장고 문을 열더니 묻는다.

"엄마, 이 우유 마셔도 돼?"

"유통기한을 확인해봐. 뭐라고 쓰여있어?"

"음... 9월 15일... 12시 30분... SJB... 까지라고."

"그럼 내일 12시 30분까진 마셔도 되겠네."

"오... 그럼 12시 31분에는 마시면 안 돼?"

"안되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잖아. 딱 29분 59초까지만 마셔."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나도 웃는다.

진수도, 톰 소령도, 웃었다.


- 끝


* 톰 소령 : David Bowie의 <space oddity> 주인공. 톰 소령이 (아마도) 사고로 우주선이 고장 나 지상의 관제탑과 연락이 끊기고 우주를 떠돌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제목도 이 곡의 제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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