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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이 Sep 19. 2023

병원에 가다

츄르와 텐텐사이 

지난겨울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봄이와 나는 보온 물 주머니를 공유하며 자고 있었다. 새벽 3시 35분, 갑작스러운 고양이의 재채기 소리에 잠에서 깼다. 봄이는 내 옆에 딱 붙어있는 보온 물 주머니 위에 딱 붙어 자고 있던 터라 춥지는 않았을 텐데, 잠이 달아나도록 재채기를 한다.


"아, 야, 침~~~ 진짜..."


귀찮았다. 일어나 조용히 하라는 투로 밥을 주고 다시 들어가 누웠다. 잠결에 거실에서 재채기 소리가 연신 들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봄이가 새벽에 자기 방에 들어와 재채기를 했단다. 그때  복숭아 방에서 봄이의 재채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입도 안 가리고 재채기를 한다고, 우리는 속닥속닥 흉을 봤다.


 새벽밥이 거의 줄지 않았다. 평소에는 8시쯤이면 대부분 비워져 있는데, 2/3가 남아있었다. 봄이는  종일 잤다. 깨어있을 때라고는 재채기를 할 때뿐이었다. 발작 같은 재채기와 쳐진 몸에 놀란 나는 원인을 찾다가  토요일에 사 온 튤립 구근 화분을 떠올렸다. 노란 튤립이 보고 싶어 화원에서 4천 원을 주고 구근 한 뿌리를 사 왔는데, 사 온 지 한 시간도 안 돼 봄이는 두 번이나 뒤집어엎었다. 흙으로 범벅이 된 거실을 치우면서 이노무시키, 이노무시키, 했었는데.


백합이나 튤립과 식물은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독성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깜박했다.  특히 구근은 극소량만 섭취해도 급성 신부전을 일으킬 수 있다. 고양이에게 해로운 식물이 많다해서 작년부터 화분 사는 취미를 뚝 끊었고, 갖고 있던 것조차 친구에게 넘겼는데, 지루한 겨울 탓에 그만 방심했다.


화분을 엎어 구근을 살펴보니 다행히 이빨자국 같은 것은 안 보였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 아파트 1층 화단에 옮겨 심었다. 꽃은 무사히 피었으면.


봄이를 계속 지켜봤다. 재채기를 하는 빈도수는 줄어드는 것 같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 잠만 자고, 잠만 자니까 재채기할 틈이 없는 건가 재채기하느라 지쳐서 잠만 자는 건가,  밥도 잘 안 먹고 물도 안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밤이 될수록 불안해졌다. 월요일, 병원에 갔다.  


구구절절 2박 3일간의 내 얘기를 듣던 수의사는 튤립 얘기에 말을 끊더니 물었다.

"안 먹은 게 확실해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먹지 않았어요. 얘가 얼마나 똑똑한데요.


튤립 구근을 안 먹은 것이 확실하고, 밥과 물을 완전히 끊은 것이 아니라면, 환절기 재채기일 수 있으니  알레르기 약을 먹어보자 한다. 고양이는 개와 달리 밥과 물을 이틀 이상 안 먹으면 건강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환자와 대화를 할 수 없으니 원인을 찾으려면 검사를 해야 하는데 검사비가 많이 나올 터, 원인을 찾아 하는 치료가 아니라 증상을 하나씩 지워가는 치료를 한단다.


그러니까 나의 동거묘는 조금이지만 밥과 물을 먹고 있고, 내가 튤립은 절대 안 먹었다고 확신한 데다, 월요일 아침에는 일요일보다는 조금 더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으니, 검사는 하지 않고 일단 재채기를 멈출 수 있도록 지르텍같은 약만 처방한 것이다.

  

수의사가 또 물었다.

"봄이가 순해요?"


그럼요, 얘가 얼마나 착한데요.

그럼 체온을 재보겠습니다, 하더니 똥꼬에 체온계를 쑥 넣었다. 고양이 체온을 이렇게 재는지 미처 몰랐던 나는 또 목이 메었다. 체온도 정상이고 체중도 정상 범위이에요. 이틀 동안 약을 먹여보고 더 심해지면 다시 오세요.


간호사가 약을 주면서 츄르에 섞여 먹이라 했다. 츄르를 한 번도 먹여본 적 없다 하니 화들짝 놀라며 당황한다.

"그럼 어떡하지..."


나는 여기서 파는 츄르 한 봉지를 같이 계산해 달라고 했다. 츄르대신 아픈 고양이를 위한 보양식 캔을 보여준다. "아파서 입맛 없는 애들을 위한 제품이에요. 이거 조금에 약을 섞어서 입을 벌리고 쏙 넣어주세요."


식욕 및 회복을 촉진해 주는데 도움을 주는 '약재를 우려낸 치킨 육수를 베이스로 한 들깨와 말린 진피' 캔 30g짜리를 두 개 샀다. 집에 돌아와 간호사가 말한 대로 약을 섞어 입에 넣어줬다. 착하고 순한 봄이는 잘 받아먹고 더 먹고 싶어서 코를 킁킁거렸다. 나는  절반은 아껴뒀다 저녁 약 먹을 때 먹자 했다. 아쉬웠는지 아침에 남긴 사료를  먹었다.


미세 먼지 때문에 콧물과 함께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일 수도 있다는 수의사 말이 생각났다. 춥다고 게으름 피웠나 보다. 일어나 청소를 했다. 먼지와 머리카락을 빨아들이고 물걸레질도 했다. 수건을 빨아 건조대에 널어 집 안 습도도 높였다. 약을 먹고 청소하는 나를 조금 따라다니던 봄이는 다시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열감기에 시달리다 한 손에 텐텐을 쥔 채 잠들었던 5살짜리 복숭아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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