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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30. 2020

봄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운다

#장성 단전리 느티나무

목련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나리도 개나리대로 하루치 봄을 사는 중이다. 오늘은 내 하루치 봄날이다.


-박연준 산문집 '모월모일' 中 (문학동네, 2020년)





봄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운다.


방금 추월해왔던 초보운전 차가 느리게 지나쳐간다. 조수석의 남자가 손잡이를 잡은 채 카메라를 꺼내는 나를 쳐다본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화사해서 눈이 감기려 한다.  저수지는 봄바람에 잔 물결을 만들고 있다. 나도 남도의 봄처럼 미동(動)한다.



국도를 타고 이리저리 길을 휘저으며 가는 중이었다. '단전리 느티나무'라는 표지판을 봤을 때는. 급할 것 없는 길이었고, 내비게이션이 추천하는 '최단시간 경로'를 거부하고 싶은 오후였기에 표지판을 따랐다. 조그만 주유소가 있는 작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니, 양 옆에 아담한 나무가 즐비하다. 느티나무겠지,라고 생각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창문을 모두 내리고 천천히 운전을 한다. 머지않아, 자동차 도로 고가 밑으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농가 쪽에도 도로 쪽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번, 봄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운다.



오래전에는 벌판이었을 곳에 사람들은 길을 냈다. 뒤로 자동차 도로가 산허리를 자르고 있고, 2차선의 국도는 마을과 나무 사이를 가르고 있다. 자동차 도로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와 수로까지 나무 주위를 감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은 나무를 벨 생각은 하지 않았나 보다. 도로와 수로가 나무를 피해 휘어진 각이 사람들이 가진 친절함의 정도다. 그 정도라면 훌륭하다.



굵은 둥치가 땅을 움켜쥐고 있다. 수피는 흐트러지지 않고 울근불근하다. 앞으로도 수백 년은 거뜬히 이곳을 지킬 듯한 모습이다. 나무의 성미를 보고 자란 이들은 성급함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도로 너머의 산과 나무는 하늘을 공유한다. 구름이 흐르는 한 산의 자연과 나무의 자연은 이어진다. 먼 곳에서 온 바람이 구름에 밀어내고 나무 위로 내려온다. 보호 난간을 짚고 선다. 내가 아는 모든 염문(聞)을 털어놓고 싶어 진다. 스스로 염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땅의 것들은 모두 위로 향한다. 수백 년이 된 나무나 민들레나 마찬가지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 아래에 숨을 것들을 위해, 민들레는 홀씨를 날려 보낼 바람을 위해 직립을 고집한다.


모두 맞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켠다. 내 몸의 평면으로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문득, 올봄에는 나비가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한 몸에서 나온 가지들은 다투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가지들이 공간을 차지하려 얼기설기 엉킨 듯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겹치지 않는다. 그들은 빛이 공평하다는 걸 안다. 시간이 투박하다는 걸 안다. 그들은 자신들이 틔울 잎들이 겹치지 않아야 나무의 그늘이 넓어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주 멀리서 보면 가지는, 우리가 기분 좋게 손바닥을 쫙 펴듯 가지들이 펴 있다. 태양이 모든 가지를 친견(見)하고 지나간다.



멀찍이 서서 나무의 전체를 감상한다. 호감이 넘치는 풍경이다. 모든 게 금세 낡아지는 도시에 살다가 이런 풍경을 마주하면 어쩔 줄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별을 보듯 잎을 보고 파도를 보듯 구름을 본다. 물이 가득한 낮은 밭에서 빛이 반짝거린다. 저 밭의 고도(度)가 높아질 때, 나무가 거느릴 그늘의 밀도도 같이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그걸 계절이라 부르고, 나무는 아무런 명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건너에 있는 집에 있는 누군가는, 매일 밤 나무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기면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밤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나무가 사라져 있는 그런 상상. 자신의 모든 걸음과 애상(想)을 알고 있는 나무가 풍경 속에서 지워진 그런 상상.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침이면 대문을 열고 나가 나무의 안부를 확인할 것이다. 길을 가던 내가 봄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풍경을 담아가듯, 그는 나무의 가장자리에 자신의 삶을 정박한 채 세월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다시 떠난다. 숫자는 이곳까지의 거리를 말해줄 수 없다.



*단전리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478호다.


*내비게이션(T맵)에 단전리 느티나무를 검색하면, 용인시의 느티나무슈퍼가 제일 먼저 뜬다. 어쩌면 그 슈퍼가 있는 풍경도 여기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이곳을 찾아갈 때는, 주소를 찍고 가면 될 것 같다.

주소 :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전리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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