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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27. 2020

아무도 아닌 채 늙을까 봐

빈집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계단이야


-시 '유리병' 中, 여성민 시집「에로틱한 찰리」





아무도 아닌 채 늙을까 봐 두려워.

아무 사람도 아닌 채 차곡차곡 늙어갈까 봐.

그렇게 두려워질 때가 있어.


티를 내진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걸었던 기대들,

혼자 키운 욕망이 남사스러워서, 입밖에 내지 않았던 그 기대들을 생각해.



우리의 사나이가 우리가 모르던 사나이가 된 기억들이 있어.  

우리가 기대하던 모습이 사라진 사람을 낯설게 쳐다봤던 기억. 


나 역시, 내가 모르던 사람이 돼 버리진 않았을까.

스스로의 기대에서 벗어나, 좌초된 욕망을 모른 척하는,

익명의 누군가가 돼 버린 게 아닐까.



결국 우리의 기대는,

기대라는 이유로, 늘 근거가 빈약하지 않나 싶어.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선 허황되니까.

별다른 논리 없이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두곤 하니까.



그런데 말이야. 조금 가볍게 보고 싶긴 해.

나를 익명으로 만든 수많은 기억은 지워버린 채.


나 자신에게 바랐던 모습이, 우그러지고 색이 바래서 볼품없어도

반성이나 후회, 안타까움 같은 감정으로 덮어버리는 대신에,

피식하고, 다음 단계의 기대로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과장된 욕망이 허용되는 유일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건,

볼품없는 욕망들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면서 꽤 유용한 위안이니까.  


어떻게든 늙어갈 텐데,  

아무것도 아닌 나보다는 허황된 나로 사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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