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의 가치
여름방학기간이었다. 방학중인 첫째 아이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대화할 시간도 많다. 누워서 데드버그자세로 코어운동을 하며 아이와 얘길 하는데, 문득, 아이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나 궁금해졌다.
“엄마가 재활병원부터 지금까지, 거의 1년 반 정도 운동하는 거 보니 어떤 생각이 들어?”
“엄마는 삶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한 것 같아.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이대로 다리를 버려둘 수 없다.’ 이러는 것 같아. (큭)”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재활을 거치는 과정이, 이왕이면 아이에게 ’ 포기하지 않는 ‘,’ 악착같은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였으면 싶었다.
힘듦을 이겨내고, 노력하고, 점차 강해지는 과정은 외형적으로는 추레함이, 내면에서는 검정의 기복이, 그에 더해 땀냄새와 찐득함이 묻어난다.
이 시간은, 보기 예쁘지 않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는 과정은 숨기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지금까지 삶의 모든 면이 다 그랬다.
‘잘 노는데 성적이 좋은’,
‘공부 안 했는데 시험에 합격한,
‘먹을 거 다 먹는데 다이어트 성공한’
심지어 육아에 있어서도
‘사교육 안 하지만 똘똘한 아이를 키워낸 엄마=나’이고 싶었다.
물 밑에서 발버둥을 칠지언정, 보이는 모습만은 고고한 백조 같고 싶었나 보다.
못나 보이는 과정은 숨기고, 성취로 귀결된 완성된 모습만 보이려니, 결승선까지 가는 지난한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지쳤다. 그 결과 대부분은 지속하지 못했다. 운동도, 영어도, 독서도, 일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어떤 목표, 성취를 위해 악착같이, 끈기 있게 매달리며 노력해 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목표지향적인 삶을 강요받아왔다. (당시에는 ‘강요’라는 생각조차 없이 받아들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라는 말은 그 강요를 정당화시키는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마흔 살이 되고 나서야 크고 작은 목표의 성취,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 순간보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어있고, 그렇기에 과정도 눈여겨봐주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예전엔 보이지 않았다.
‘삶은 여정이다.’
라는 말은 누가 가장 먼저 썼는지 모르지만, 삶이 수많은 과정들의 집합이라는 면에서 기가 막힌 비유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결승선을 통과한 멋진 모습만 좋아했지만, 오늘의 나는, 성장해 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아이들에게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좋다.
다시 아이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사춘기의 문을 연 첫째는, 이젠 잔소리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말을 많이 할수록 싸움이 되고, 감정이 상하니, 말 수를 줄이고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게 모녀관계를 지키는데 좀 더 낫겠다 싶었다.
잔소리 대신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행동(운동, 건강식, 독서, 글쓰기 등)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어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아이와 싸우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아이는 친구들과 간식을 사 먹을 때도, 성분표를 찾아보며 덜 해로운 음식을 고르려 노력하고,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땀나게 운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귀찮아 하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영어책을 스스로 읽고, 종종 시처럼 짧은 글을 지어 문자로 보내온다.
좋은 식재료를 선택해 건강하게 먹고, 매일 운동을 하며, 매일 책을 읽고, 자주 글을 쓰는 우리 부부의 생활이 그대로 묻어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나의 일상도 좀 더 신경 쓰게 됐다.
결국 나 한 사람을 잘 보듬는 것이, 내 주변도 모두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옛사람들은 어찌나 혜안이 있었던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말로 이 가르침을 압축해 놓았다.
나는 ‘치국’이나 ‘평천하’까지는 뜻이 없으니,
일단은 ‘수신’에 매진하고, 괜찮다면 ’ 제가‘ 까지는 잘할 수 있지 않을까?